내설악에서 외설악으로 (설악산)
* 2011.09.18 / 백담사 탐방안내소(10:20)-샤틀버스 타고 백담사(10:40)-영시암-오세암-마등령-비선대-소공원 주차장(16:15)
(진부령 넘기 전 인제 어느 마을 / 버스 차창가에 스친 풍경)
(백담사)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가 무정합니다.일주일동안 설악을 만난다고 잔득 기대를 갖고 기다렸지요.그런데 백담사 탐방안내소에 내리자 비가 살포시 동반하자고 옆지기를 자청합니다.설악의 비가 오늘 아내가 함께 하지 않은 걸 알고 옆구리를 치고 들어옵니다.일행들은 비옷이나 우산을 꺼내지만,배낭커버만 씌우고 비를 맞기로 작정합니다.경험칙상 비 맞으나 비옷 입고 땀으로 젖으나 젖기는 매 한가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나중에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었음이 판명되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백담사 탐방안내소에서 셔틀버스(@2,000)를 타고 백담사까지 단숨에 갑니다.2년 전에 용아릉을 가면서 무박 새벽길을 걸어보니 탐방소에서 백담사 일주문까지 7km가 넘는 거리입니다.이 거리를 걷지 않고 셔틀버스를 탔으니 시간 단축이 1시간 20분은 된 것 같습니다.요즘은 왜 이렇게 꽤만 느는지 낡(늙X)아가는 모양입니다.
백담사 절집을 잠깐 들려 옛 세월과 시절을 떠 올립니다.28년 전 처음 이 절집에 왔을 때는 단촐한 암자로 기억합니다.그 후 몇 차례 설악산 산행을 올 때마다 중수되는 모습을 목격했지요.어느 전임 대통령의 유배지가 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절집도 중수가 되어 건축물이 여러 채 들어섰습니다.주마간산 격으로 훓어보고 절집 옆 냇가에 관광객과 신도들이 세운 돌탑들을 바라봅니다.많은 이의 정성어린 손길이 닿아 명장면을 만들어 놓았습니다.개울 건너 사람 키를 넘는 각시취가 소담스럽게 피어있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절집을 들리고 보니 일행들은 벌써 내달리고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오늘도 뒤쳐지고 맙니다.오늘 산행시간은 6시간 30분 후 소공원주차장에서 버스가 서울로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빡빡한 스케줄이라 꽃 사진 찍으며 여유부릴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보통 이 코스는 7~8시간 걸리는 코스인데 오늘 산행대장은 좀 타이트하게 운영하는군요.하지만 단체산행이니 통제에 따를 수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이미 자신없는 사람은 세시간 짜리 B코스인 울산바위로 갔기 때문입니다.비는 그칠 줄 모르고 사뭇 내립니다.구름 안개가 시야를 가려 조망도 없습니다.그러나 산행길은 즐겁습니다.들국화라 통칭되는 산국,까실쑥부쟁이,가을에 꽃을 피우는 이고들빼기가 반깁니다.숲 속을 이리저리 훓으며 걷는데 지금까지 통성명을 하지 못한 초롱꽃과 들꽃이 바자가랭이를 붙듭니다.당장 초롱꽃과에서 2~3회 깃꼴겹잎을 가진 꽃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디카에 전초를 담고 그 자리를 뜹니다.
선두는 어디메 쯤 가고 있을까? 많이 뒤쳐지지 않으려고 속보로 걷습니다.안개가 잔뜩 끼고 비가 내리기때문에 주변 경관을 볼 수가 없어 선두도 오직 내달리는 모양입니다.우리 산행문화도 많이 달라져야한다고 봅니다.주력이 좋은 산꾼들도 산길을 시속 2~3km로 내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무릎 고장을 얻습니다.트레킹하듯 주변 경관 즐기며 하늘도 바라보고 꽃과 나무도 관찰하며 느릿느릿 즐기는 산행문화가 정착되어야 다리와 무릎도 탈이 나지 않고 오래토록 산을 즐길 수 있을겁니다.산은 오를 땐 '천천히',내릴 땐 '조심조심'내리는 길만이 산행의 요체입니다.
(통성명하지 못한 친구)
한 시간 여 만에 영시암에 도착합니다.절 마당에 설악초가 여기가 제집이라고 우쭐댑니다.
아마 설악산에서 발견되어 '설악초'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요즘은 설악초가 전국구가 되어 지방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가 있습니다.절 앞 마당엔 스님들이 가꾸는 들꽃들로 풍성합니다.참당귀,모란,털진득찰 등 스님들이 정성들여 가꾸는가 봅니다.모두가 튼실합니다.미꾸리낚시도 숲 속에 숨어 있군요.미국가막사리인줄 알고 디카를 들여댔더니 '털진득찰'이라고 신고하네요.잠깐 들풀 친구들에게 한 눈을 파는 사이 일행 몇 분이 국수 공양을 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국수를 좋아하는 필자도 한 축 끼어 국수공양을 받습니다.
▶ (설악초)
▼ (참당귀)
▼ (모란 열매)
국수공양을 받고 헌공함에 헌공도 하지 않고 뒤돌아서니 뒷통수가 많이 땡깁니다.절집에서 공양받고 난생 처음 뺑소니치듯 자리를 뜹니다.비는 계속 내리고 지갑은 배낭 속 어딘가에 비닐로 둘둘 싸 깊이 넣어 놓아 꺼내기가 귀찮은게 작은 이윱니다.뒷통수가 땡기지만 나이드니 공짜 점심 먹은 맛이 더 큰가 봅니다.영시암에 외상 달아두고 길 떠납니다.
배가 부르니 산길이 더 꼬불댑니다.십자고사리 밭을 만나고 도깨비부처,그늘참나물,우산나물,박쥐나물 등 본격적으로 숲꾸러기들과 인사를 나눕니다.계곡 옆엔 나무빨래판을 연상시키는 까치박달이 많이 보초를 서고 있군요.영시암과 오세암을 오가는 신도를 영접하고 있는 듯 모두 계곡 옆 길가에 도열하고 있습니다.빗물을 머금어서인지 더 뚜렷한 잎맥을 자랑합니다.
(십자고사리) (도깨비부채)
(그늘참나물)
(까치박달나무)
숲꾸러기들과 놀다보니 또 후미로 뒤쳐졌습니다.속보로 길을 걸으니 들풀들이 싫어합니다.그들도 숲 속으로 꽁꽁 숨어버리는군요.오세암에 당도하니 선두는 절집 처마 밑에서 옹기종기 도시락을 까 먹고 있습니다.필자도 한 켠에 엉덩이를 붙이고 도시락을 까 먹습니다.매실주 한 순배가 돕니다.으실으실 비에 젖은 몸이 떨리기 시작합니다.계속 산길을 걸을 땐 몰랐는데 쉬며 밥을 먹으니 몹시 춥습니다.저체온증이 아마 이렇게 나타나나 봅니다.빠른 속도로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전 배낭 속에서 우산을 꺼냅니다.다 젖은 옷과 몸인데 우산을 꺼내 든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엊그제 거금을 들여 수리한 디카에 빗물이 들어가 또 작동을 멈출까 걱정이 되어서입니다.필자의 몸보다 작은 디카가 더 존중을 받는 꼴이 우습습니다.우리 인생사도 이렇게 일의 경중이나 시간적으로 완급의 사항이 뒤바뀌는 일이 범부들에겐 다반사로 일어납니다.필자도 선남선녀 중 한 사람이고 보니 가끔 앞 뒤 순서가 뒤바뀌는 일을 곧 잘 합니다.필자도 장삼이사지요.시행착오를 겪고서야 후회하며 반면교사로 삼습니다.그게 필부의 인생이죠.
◀ 오세암
마등령으로 오르는 길은 산행하는 맛이 납니다.울울창창한 숲 길에 가끔 된비알도 나타납니다.아름드리 소나무(실제 두 팔 벌려 재보니 둘레가 5M 정도 됨) 수십 그루가 숲 을 지키고 있었습니다.지금까지 산행 경험 중 제일 오래 되고 허리가 굵은 소나무 군락지입니다.또 즐거움이 더해졌습니다.지천으로 피어 있는 투구꽃이 반깁니다.2주전 예봉산에서 놋젖가락나물을 만났는데 투구꽃과 거의 똑 같습니다.줄기가 옆으로 기는 것을 빼고 잎 모양새나 꽃 모양새가 둘이 너무 흡사합니다.투구꽃에 마음을 빼앗기고 디카 셔터를 마구 눌러댑니다.
마등령에 도착하여 일행들과 정상행사를 치룹니다.(대한민국 만세! 설악산 만세! 오륜산악회 만세!)를 합창합니다.20여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행사 의식입니다.만세를 주례하는 사람이 당일 뒷풀이 비용을 후원하는 아름다운 전통이지요.오늘 집례자는 김ㅎㄱ 전임회장입니다.빗 속에서 우렁찬 만세소리가 마등령을 울립니다.그리고는 다시 비선대로 긴 내림길을 내립니다.내림길에선 버스 출발시각에 맞춰야겠기에 들풀친구들한테 눈길을 흘길 뿐 지나칩니다.숲꾸러기들의 항의가 들립니다.'야속타! 야속타!'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마등령 아래 안부에서 금강굴,비선대로 내리는 돌계단 내림길은 필자가 붙인 이름이 있습니다.'악의 길'이라고 말이지요.7년 전인가로 기억하는데 아내와 설악 공룡능선을 타고 내리다가 이 돌계단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가끔 이 길을 회상할 때마다 '악의 길'이 생각납니다.
큰 부상없이 길을 내려 예정시각 안에 버스에 올라탑니다.일행 모두들 준족의 실력을 과시한 산행이었습니다.비에 젖은 몸과 마음을 척산온천장에서 말끔히 씻어냅니다.속초 중앙시장에 있는 '88생선구이전문점(033-633-8892)'에서 모듬 생선구이로 저녁을 들고 귀경길에 잠시 눈을 감고 오늘 만난 숲꾸러기 친구들을 회상해봅니다.그들과 빗 속의 데이트가 한 편의 파노라마가 되어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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