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폭우속의 여름사냥 (명지산 : 1,26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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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7 (일) / 산하가족 세 부부
*상판리 귀목마을(11:35)-장재울골-귀목고개-3봉-2봉-1봉 명지산 정상-원점회귀(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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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가을 문에 들어선다는 입추(立秋)절기다. 그러나 아직 계절은 한 여름 속에 있다. 요즘도 가끔씩 국지성 호우를 동반해가며 여름이 땡볕 속에서 열(熱) 숨을 토해가며 농익어간다. 허나 계절이 내쉬는 열 숨 속엔 서늘함도 가끔은 숨어있다. 이렇게 계절은 가을을 옹골지게 잉태하느라고 안간힘을 쓰며 그 마지막 열기를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정부를 출발한 여름사냥팀이 막 가평 현리에 들어서자 운악산 마루금에 걸린 뭉게구름은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내고 있다. 우측 차창으로 보이는 연인산 봉우리는 한 떼의 운무가 산허리를 휘감아쳐 오른다. 그리고 명지산이 고봉을 자랑하며 어서 내 품에 안기라고 반긴다.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성큼성큼 차도를 뛰어 건너 숲속으로 숨는 여름풍경이 너무도 목가적이다.
# 경기 최고의 청정지역을 품고
장재울골 들머리에 생태계보존지역 팻말
명지산(明智山, 해발 1,267m)은 한북정맥의 한 자락으로 가평군 북면과 서면을 경계로 우뚝 서 있다. 가평천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의 최고봉 화학산(1468.3m)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장쾌하다. 강씨봉, 귀목봉, 청계산과 연인산 등과 줄기를 이어가며 심산유곡을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골도 깊고 상큼한 수림향이 코끝을 자극하는 청정지역이다. 1200고지가 넘는 산이다보니 산이 중후하고 산길 또한 조금 거친 맛이 나는듯하다.
# 상판리 귀목마을을 들머리로
명지산을 오르는 길은 크게 북면 익근리계곡을 거쳐 오르는 길과 상판리 귀목마을을 거쳐 오르는 길이 있다. 오늘 산행코스는 귀목마을 장재울골을 거쳐 귀목고개를 경유해서 3봉, 2봉을 거쳐 정상을 오른 후 하산은 3봉을 지나 갈림길에서 아재비고개를 거쳐 큰드래골로 하산예정이다.
# 장재울골을 들어서며
귀목마을 장재울골 초입엔 물놀이 피서객으로 만원이다. 현리 계곡 내내 계곡물에 몸을 담고 물놀이가 한창이다. 우리 세 부부는 피서를 버리고 여름사냥하러 배낭을 짊어지고 명지산 심산유곡으로 들어선다. 초입 장재울골의 풍경은 한적하다. 늦은 시각이라서인지 산객이 없다.
청정지역 명지산 자락에 들어서자 코끝이 상큼해온다. 장재울골의 환영을 받으며 가벼운 발걸음을 뗀다. 들숨, 날숨 모두 아직은 편안하고 깊다. 잣나무 숲길을 가며 맑고 청명한 날씨의 축복을 받았다며 이구동성으로 덕담을 건넨다. (그러나 몇 시간 후 하산길 내내 갑작스런 국지성 폭우를 만나 강펀치를 얻어 맞을 줄을 중생들은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
귀목고개 이정목 (상판리 2.5km / 명지1봉 3.7km)
# 귀목고개 안부에서 숨을 고르고
도심에서 느끼는 열통에서 벗어나 숲향이 선사하는 청량감을 선택하는 체험은 우리를 숲 속으로 끌어들이는 또 하나의 작은 이유가 되기도한다. 편안한 숨쉬기도 잠시, 귀목고개 된비알을 치고 오르는 일행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흐르는 땀은 이마, 목덜미 등줄기를 가리지 않는다. 귀목고개 안부에서 숨을 고른다.
오늘따라 아내의 컨디션이 퍽 좋아보인다. 항상 일행의 속도에 부담을 주곤 했었는데, 오늘은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않다. 평일 야간산행 훈련 탓일까. 처음엔 장시간의 거친 산행을 염려했으나 시작이 좋아 한 시름을 놓는다. 이런 컨디션이라면 명지산 정상도 그녀를 힘껏 포옹하리라.
일행의 격려도 한 몫을 한다. “설악 공룡타도 문제 없을 것 같다”는 윤대장의 격려에 정작가 사모님은 “올 가을에 우리 장수대 같이 가요”라며 아예 못을 박는다. 아내의 빙그레 웃는 웃음은 그에 대한 화답인지 아니면 동행인들에게 거북이 산행 민폐를 덜 끼칠 산행실력에 대한 자긍심인지 아리송하다.
# 3봉(1199m) 가는 길
귀목고개는 좌측으론 귀목봉(1036m), 우측으론 명지산 가는 길의 갈림길이다. 3봉 가는 길은 편안하지가 않다. 습기가 많고 바위틈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로 둥로가 젖어 있어 미끄럽다. 오름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오른다. 이따금 산바람이 마중을 나오지만 잠깐 스쳐갈 뿐 구슬같은 땀방울로 온 몸이 젖는다. 그래도 길섶에 동자꽃, 산수국등 야생화들이 방긋방긋 반겨주니 산 길이 지루하지않다.
3봉가는 길목 전망터에서 내려다 보는 귀목마을 장재울골은 깊다. 올려다본 귀목봉은 봉우리가 뾰쪽하여 삼각뿔같다. 청계산은 밋밋하게 등줄기를 내보이고 운악산 마루금은 병풍바위 위에 살포시 긋고 있다. 갑자기 운무가 몰아치며 산허리를 감싼다. 멀리 산들이 운무속에 가리고 우리도 운무 속에 갇힌다.
3봉 쉼터에서 본 연인산
명지3봉(1199m) 이정목-명지1봉까지 1.3km
가까이 3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우린 시장기를 3봉 아래에서 해결한다(‘명지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명지1봉은 식사를 하고 구경을 해야한다???). 금년 여름 주말마다 연이어 네 번이나 산상만찬에 하산주까지 같이 하다보니 세 부부는 이미 오랜지기인 양 허물없는 산친구가 되어버렸다. 정작가 사모님도 윤대장 사모님도 주말이 되면 우리가 보고 싶다고 하는데 우리 또한 그립기는 마찬가지이다.
# 2봉(1250m)을 지나 1봉 명지산 정상(1267m)에 서다
산상만찬으로 불록해진 배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2봉 가는 발걸음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3봉까지 선두자리를 지킨 우리 부부는 두 부부에게 선두를 내주고 후미로 오른다. 운무가 피어 올라 산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여러차례 반복된다. 2봉 가는 산길엔 여기저기 야생화가 방긋대며 안개 속에서 자태를 뽑낸다.
명지2봉(1250m) 기념촬영
2봉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다시 명지산 정상이 구름 속에 숨는다. 2봉에서 1봉가는 길은 내림길을 타고 내리다가 다시 치고 오르는 길이다. 드디어 정상에 서니 다람쥐 한 마리가 정상세(頂上稅)를 달라고 한다. 그러나 블록해진 배만 보여 줄 뿐 줄 것이 없다. 3봉에서 다 배에 담고 와서 미안할 뿐이다. 그렇다고 배낭에 달랑 하나 남긴 이슬초 한잔을 건넬 수는 없지 않은가.명지1봉 정상(1267m)
# 산에서도 탈세(脫稅)는 죄인가?정상에서 조망은 오리무중이다. 경기 최고봉 화악산도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고 그져 사방팔방을 둘러 보아도 스치는 구름안개 뿐이다. 다람쥐에게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조망권을 박탈하는가. 허허, 자연은 한 치의 불법(不法)도 공짜도 없구나.(나중 하산길에 ‘폭우중형’까지 받을 줄이야)
이젠 정상에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어찌 하늘이 수상하다. 청명하던 오전 하늘이 갑자기 검으스레한 구름으로 덮힌다. 일행은 서둘러 산을 내려온다.
# 하산 길에 만난 폭우
2봉을 지나며 멀리서 천둥치는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미끄러운 오르내림을 몇 차례 하고 나서 갑자기 빗소리를 듣는다. ‘우두두둑’ 숲속 길 참나무 이파리에 내려앉는 소낙비 소리가 ‘뚜뚜뚜둑’ 화음을 높이는데 까진 1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이건 소낙비가 아니다. 폭우다.
일행은 판초우의를 꺼네 입는다. 우리 부부는 그져 가난하다. 맑은 날에도 늘 배낭에 넣고 다니던 레인 자켓을 오늘은 왜 짐을 덜고 왔는지 후회막급이다. 배낭카버만 달랑 씌우고 폭우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배낭 속엔 비닐 방수품(등산화에 덧 씌우는 비닐)이 들어 있었으나 순식간에 얻어 맞은 폭우같은 소낙비에 시골 물레방아간의 추억만 생각날 뿐 아무 생각이 없다.
# 윤대장의 ‘기사도정신'에 감동하고
앞서가던 윤대장이 힐끗 뒤를 돌아 보더니 빗 속에서 얼룩무늬 판초우의를 벗어 아내에게 덮어 씌운다. 갑자기 우중에 산길을 행군하는 여군 한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아~ 이 감동을 어찌 다 이 필설로 표현하랴.
그래서 제일 혈기 왕성한 두 사내만 쫄딱 맞은 비로 ‘비 맞은 장탉’이 된다. 미끄러운 하산길을 조심조심 내려온다. 귀목고개를 지나 장재울골로 들어서니 폭우 빗 줄기가 많이 가늘어졌다. 계곡 물소리가 ‘콸콸콸’ 제법 크게 들린다. 산을 내려와 계곡물에 대강 씻은 뒤 귀목마을을 벗어난다.
# 다시 현리 운악산 아래에 자리잡고
이미 출출해진 허기를 가평 잣 막걸리 몇잔으로 하산주를 대신한다. 몇 순배가 돌아도 산행담은 끝이 없다. 테라스가 있는 선술집에서 밤비 내리는 운악의 정취를 느낀다. 불콰해진 얼굴엔 웃음 밖에 없다.
# 귀가길은 ‘돌고돌아’
현리에서 의정부 가는 귀가길은 휴가를 끝내고 귀가하는 차량과 뒤엉켜 차량적체가 심하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지루하지 않다. 낡은 카세트에서 흘러 나오는 트롯과 블루스 곡들을 들으며 박수를 친다. 가창력과 호소력을 지닌 익숙한 목소리다. “오~빠!”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금 운전대를 잡고 있다. 왕년에 밤무대 깨나 주름잡았을 무명가수의 리사이틀을 들으며 몸도 돌고, 길도 돌고 돈다. 여름사냥을 끝내고 의정부를 돌고돌아 집 앞 현관문을 들어선다. 배낭 깊이 넣어둔 핸펀의 시각은 자정을 넘기고 00:11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200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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