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랑 운무 속에 등천하는 공룡을 타고
(설악산/오색-대청-공룡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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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4 (토) / 아내랑 (K산악회를 따라서)
*오색 매표소(02:30)-대청봉-중청-소청-희운각-신선봉-1275봉-나한봉-마등령-비선대-소공원
주차장(14:30)
*산행거리 : 약 20 km - 12시간 (휴식시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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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진혁진님의 백두대간과 산행정보-산행지도)
5년전에 직장 직원들과 함께한 대청봉 등정길에 아내를
동행시켜 오른 오색-대청봉-천불동 코스가 회상된다 그런데 가이드가 안내한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려 잠든 아내 얼굴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새벽
2시30분경 입산 시작하여 07:30에 희운각 대피소를 통과하는 사람만이 공룡능선을 타고 그 후론 공룡능선길을 통제하고 천불동계곡으로
하산시킨다며 아울러 1분도 더 기다리지 않고 정확하게 15:30에 소공원 주차장을 출발한다고 엄포아닌 안내를 곁들인다.
#비내리는 강원도길 / 아내여! 대청봉 일출은 꿈에서나
보시라
깜깜한 44번 국도길은 늦은 시각인데도 생각보다
차량통행이 많다. 우리처럼 북으로 북으로 여행가는 사람들일까? 대형버스들은 무박 산행팀일게고 자가용팀들은 동해안 새벽바다 구경꾼들일까. 원통
인제를 지나면서 버스 창가에 가는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일기예보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대청봉 일출은
접어야하는가.
02:30분에 오색 매표소에 도착하니 앞서 산행버스가 몇
대 도착해 있다. 우의를 입고 어둠속으로 산길을 들어선다. 뒤 돌아보니 랜턴 불빛이 순례자처럼 길을 잇는다. 미끄러운 산길을
앞사람 발길을 따르며 오름길을 오른다. 아내도 말없이 잘 따라온다. 앞서가던 산객들이 중간중간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쉬고 있다. 계곡 물소리는
설악폭포를 지날 때쯤 우렁찬 폭포소리를 내며 산의 정적을 깬다. 비가 멈춰줘야 할텐데 아직도 그럴 기색은 없고 더욱 주룩주룩 퍼 붓기만 하니
하늘이 야속하기까지하다
# 곡신불사(谷神不死)라
했던가
노자 6장에 보면 '곡신불사'란 말이 나온다.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라고 직역해본다. 산 봉우리들이 제각기 아름다움을 뽑내며 의기탱천한 모습으로 하늘로 치솟아있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저 아름다운 산 봉우리들은 모두가 다 헛것이다. 저 봉우리들의 아름다움은 오직 그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형성된 계곡의 기능과
아름다움때문에 실재한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어쩌면 자태를 뽑내는 봉우리의 아름다움보다 자태를 감추고 있는 계곡이 더 본원적이고 본질적이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리라. 봉우리가 양이라면 계곡은 음이다. 아마 곡신은 여성을 뜻하며 뿌리를 말함인가. 천불동 계곡의 신을 떠올려본다. 노자는 곡신을
통하여 도를 말함일 것이다.
3시간 10분만에 질퍽거리는 계곡 능선길을 올라 대청봉에 섰다. 막 산 정상에
오기 바로 직전에 내리던 비가 잠시 멎고 계곡에 안개와 운무로 채우고 정상석만 희미하게 길손을 맞는다. 영상6~7도쯤 되는지 손이 시렵다. 디카
셔터를 누르는 손끝이 몹시 시리다. 공룡탈 바쁜 마음에 서두른 탓인지 일행들을 20여분이나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일출대신 운무와
안개만이 우리를 반길 뿐 화채능선도 운무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지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오직 공룡 탈 일념으로
추억을 마음에 묻을까? 그리움을 세월 속에 떠나 보낼까? 맑은 날의 가을 설악의
모습을 많이 보아온 터에 오늘은 아예 운무 속의 설악 비경을 즐기자고 마음에 정하니 모든 심사가 편안하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공룡능선을 타는
것은 초행길이고 비가 내린 축축하고 젖은 길이라 내심 걱정은 된다. 게다가 한정된 시간안에 산행을 완료해야 귀가하는 버스도 탈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조금은 부담이 된다. 하지만 도상 예행연습도 끝낸 터이고 아내의 컨디션도 좋은지라 오늘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다.
자~가자,공룡타다 미끄러져 귀천한다 한들 무엇이
아쉽겠는가.
#운무가 넘실대는 설악 비경
속으로
대청봉을 내려와
소청길로 접어드니 새벽이 운무를 조금씩 어디론지 이동시킨다. 멀리 하늘이 조금씩 열리더니 운무가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지만 간헐적으로 공룡능선의
속살을 잠시 보여주다 이내 사라진다. 아내가 갑자기 "와~"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서북능선 쪽 속살이 하늘과 함께 열리기에 디카 셔터를
누르는 순간 다시 안개 속으로 숨고만다. 이렇게 숨바꼭질 하기를 몇 차례한다. '그래, 초보 산꾼은 비경을 카메라에 담고, 고수 산꾼은
마음에 담는다지' 누군가의 그럴듯한 말로 위안을 삼는다. 마치 필자가 이 순간만은 고수인
것처럼...
운무에 쌓인 비경을 즐기다가 깜박 시간 관념 속에서
벗어났다. 발 길을 재촉하여 희운각에 도착하니 07:30분이다. 산님 몇 분이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지만 식사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다.
갈림길에서 공룡능선을 드디어 타고 보니 걱정이 조금 된다. 이 시각에 아무도 가지 않는 이 길을 비를 다시 맞으며 시간 안에 잘 갈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은 되었으나 아내에게 걱정의 표정을 들키기가 싫어 담담한 표정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한참을 가다보니 거북이 느린 산행팀 40 여명(교회 신자
등산모임)이 신선봉 오르는 좁은 외길 산길을 전세내며 가고 있어 추월할 수가 없다. 아내도 배가 고픈지 뭘 좀 먹고 가자고 해서 바위에 자리하고
유동식과 사과 한 쪽씩으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길을 오른다. 신선봉 아래에서 쉬는 산님들을 추월하니 정체때문에 대략 30여분은 허비한 것
같다.
이젠 내리던 비도 멎었다. 신선봉을 내려서며 또 오르며
보이는 설악의 비경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맑은 날의 설악도 아름답지만 운무 속의 비경 또한 진경산수화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화가들의 화첩 복사본 (120여점)의 산수화가 머리 속에 중첩되어 더욱
실경의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신선봉에 들어서며
#구름이 머물다 간 자리 환상의 공룡능선길 그러나 결코 만만치 않아
공룡능선은 기묘한 바위가 천상으로 용트림하며 여기저기 그 웅대한 기상을 겨루며 길손을
대한다. 설악의 척추격인 공릉능선의 등줄기는 동서로 외설악과 내설악을 구분짓고 외설악 쪽으론 천불동계곡을 품고 내설악 쪽으론
가야동계곡을 품고 있다. 천화대와 일곱 봉우리들의 늘름한 모습은 과히 설악의 대표적인 모습이리라.
날씨만 청명하다면 가야동계곡의 미와 멀리 동해 앞바다의 푸른 물결까지 감상할 수 있을 텐데 조금은
아쉽다.화채능선의 조망도 아름다울 텐데 후일을 기약하라는건지. 간헐적으로 속살을 드러내는 용아릉은 마치 천상의 선녀들이 사는 선계인 양 운무
속으로 깊이 숨는다.
아내의 체력상태를 수시로 체크하며 공릉 일곱 봉우리를 넘는다. "남편 잘 만나 공룡타는줄 알아라"고
너스레를 떨어본다. 아마 아내는 웃으면서 속으론 '거꾸로 말하네'하고 독백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힘든 공룡길을 타면서 잘 따라주는 아내가
고맙다. 장거리 산행을 하다보면 체력안배가 문제가 되고 탈진할 수도 있는데 식욕이 없을 뿐 아직 까진 크게 체력 걱정은
없다.
1275봉을 들어서며
나한봉을 지나며
#현란한 일곱 봉우리는 천상으로 등룡하고
구름바다 속에서 공룡능선의 기기묘묘한 크고 작은 봉우리의 등천모습은 산행길 내내 감탄을 자아낸다. 오르고 내리기를 여러차례 반복하는
험난한 길도 운무 속에 갖힌 봉우리를 볼 때마다 힘든 줄도 모른다.
역시 공룡능선의 백미는 1275봉에서 나한봉가는 길이 아닌가 싶다. 이 길은
마치 간송미술관에서 봄에 만난 조선 최고의 남종문인화가인 현재 심사정의 대작 '촉잔도권'이란 작품 속을 거니는 것 같은 환상에 젖는다. 가파른
절벽과 구름에 잠긴 골짜기를 나그네가 유장하게 걷는 모습을 담은 인생역정을 표현한 그림으로 기억한다. 우리 부부는 잠시나마 그 그림소재의
주인공인양 착각을 하며 봉우리를 넘나든다.
마등령에서 비선대가는 길에서
비선대에서
소공원 주차장에서-권금성
미시령을 지나 달리는 차창가에서 바라본 달마봉/ 울산바위
양평을 지나며
#산길을 내려서며
가끔 산행 후에 느끼는 소감이지만 안전
산행을 우선해야 하는데도 욕심이 앞서다 보니 체력을 무시하고 겁없는 산행길이 되곤한다. 이번 공룡능선 산행길 역시 악천후에다 우리 실력엔 좀
과한듯 한데 오직 산행 일념으로 이루어졌다. 과유불급이라했던가. '지나치면 아니 미치지 못한 것만 못하다'는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경구가 새삼
떠오른다.
하지만 어쩌랴. 산을 오르면 기분이 좋고 하산주 맛이 좋은 것을. 아내에게
다음엔 설악산 서북능선을 타자고 제의하니 빙그레 웃음으로 화답한다. (2005.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