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필(落筆)

-누가 공자를 '상갓집의 개'같다고 했는가 / 최인호

천지현황1 2006. 2. 16. 17:53

-누가 공자를 '상갓집의 개'같다고 했는가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을 읽고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은 6권으로 되어 있으나 우선 3권까지 발간되었다. 우선 3권의 내용을 들여다 본다. 제1권은 공자의 왕도정치를 현실에 접목시켜 보려다 실패한 조광조의 삶을 다룬다. 2권은 공자의 정치실험을 근간으로 천하주유하는 시대상을 그리고, 3권은 공자의 이념을 학문적으로 완성한 조선의 대유림, 이퇴계선생의 생애를 담았다.

 

#'주초위왕'(走肖爲王) : 조광조는 과연 실패한 정치 개혁가인가?

 

 구중궁궐 나뭇잎에 벌레가 갈가먹은 조씨가 왕이 되려한다는  네 글자,  '주초위왕'(走肖爲王). 학창시절 국사 교과서에서 익히 들은 글자다. 조광조를 싫어하는 무리들이 그를 숙청하기 위해 꾸민 간계를 기억한다.

 

 조광조(1482~1519), 그는 누구인가?

그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중종으로부터 역적의 죄명을 쓰고 사약을 받는다. 공자의 왕도정치를 현실정치에 접목하려 했던 그의 삶은 '이상은 훌륭했으나, 그의 개혁의지는 너무 성급했다'는 후세인의 평가가 있다. 심지어 그를 흠모했던 이율곡까지도 '정암의 뜻은 훌륭했으나,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고 논할 정도다. 그러나 저자 최인호는 말한다. '선대 사람들이 조광조를 잘 못 이해한 것'이라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정치개혁과 사회정화를 체제의 전복과 개선으로 이해하려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하지만 이는 절대 불가하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체제의 전복은 또 다른 반체제의 권력독점을 의미하며, 제도의 개혁은 또 다른 부패한 제도를 낳는다고 피력한다. 진정한 개혁은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자신부터 개혁해야 임금과 백성이 하나인 천인무간(天人無間)의 이상국가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생각해도 그럴듯하다.

 

 예컨대 연산군때 두차례의 사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이미 많은 인재들이 권력싸움으로 희생되었다. 15년 뒤 중종 14년에 또 권력싸움은 기묘사화를 만든다. 홍경주, 남곤,심정 등의 훈구파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파간의 피비린내나는 혈전으로 온 조정이 피바다를 만들었다. 그 중심에 조광조가 우뚝 서 있었다.

 

 필자의 생각으론 정암 조광조는 급진 개혁으로 왕도정치의 실험을 한 것이 화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결코 실패한 정치 개혁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파당싸움을 일삼는 사이비 패거리 정치인들의 더러운 양심의 희생인일 뿐이다. 어쩌면 오늘의 새태와 비슷한지 혀를 찰 뿐이다.

 

# 누가 공자를 '상갓집의 개'같다고 했는가

 

 공자가 주유천하하는 중에 세 무덤 앞에서 슬피 우는 한 여인을 만난다. 사유를 알아본 즉 시아버지, 남편 그리고 아들까지 호랑이에 물려 죽었다는 대답을 하고 다시 여인은 대성통곡한다. 먼발치에서 이를 지켜본 공자가 여인에게 다가와 묻는다. "그런데도 부인께선 왜 이 무서운 이곳을 떠나지 않습니까?" 부인은 대답한다. "이곳은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무서운 곳이지만,세금을 혹독하게 물리거나 못난 벼슬아치들이 국민에게 함부러 노역을 강요하거나 재물을 빼앗는 일은 없답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지 못합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진리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예화다. 오늘날 위정자들이 뼛속 깊이 새겨둘 경구이기도 하다.

 

 공자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하여 56세때부터 무려 13년간이나 천하를 주유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임금을 만나지 못한다. 그래도 '상갓집의 개'처럼 천하를 주유한다. 공자는 비로소 깨닫는다. 정치적 이상을 통해 국가를 바로 잡으려는 외부적 노력보다 학문적 사상을 개발하여 자아완성 노력이 훨씬 더 값어치 있음을 알고 실천에 옮긴다. 고향에 돌아온 공자는 73세로 숨을 거두기 전까지 6년간 더이상 현실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후학을 양성한다. 후에 그의 제자들이 여러 나라의 재사로 활동한다.

 

# 명기 두향과 이퇴계의 사랑이야기

 

 충주 장회나루에 가면 짙푸른 호수 건너편 투구봉아래 아담한 묘 하나가 있다. 필자도 몇 년전에 유람선을 타며 그 묘를 보았다. 그 묘지는 바로 조선 명종, 선조시절의 충주 명기 안두향의 음택이다. 퇴계 선생이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까지 사별하고 단양군수로 부임해 와 명기 두향을 만난다. 아마 그 때 그 시절 퇴계 선생의 나이가 48세이고 두향의 나이가 꽃다운 18세였다. 나이 차이를 훌쩍 뛰어 넘은 운우(雲雨)의 만남이었나보다. 불과 9개월의 짧은 기간의 만남이었으나, 이들에게는 구만리 운우의 정을 나눈다. 퇴계는 두향을 통해 비오고 바람부는 운우의 열락을 알았을까? 평양의 명기들도 거들떠 보지 않던 엄격한 대유림 퇴계 선생의 마음을 두향은 어떻게 사로 잡았을까? 

 

 퇴계 선생은 단양 군수 9개월만에 청풍 군수로 옮겨가며 두향과 이별한다. 이별하며 두향은 시 한 수를 헌작한다. 다음은 두향의 상사별곡(想思別曲)이다.

 

 

찬 자리 팔베개에 어느 잠 하마 오리

무심히 거울드니 얼굴만 야윗고야

백년을 못 사는 인생 이별 더욱 서러워라

 

 그로부터 20년, 두향은 퇴계 선생을 그리며 옥순봉 강선대 위에서 강물에 몸을 날린다. 대유림이었던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공자의 학문을 완성한다. 조선의 대유림이었던 선생이 걷던 길이 공자가 걷던 길과 조금은 흡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6.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