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엿보기

-성골남진,「선덕여왕」

천지현황1 2009. 9. 8. 17:38

-성골남진,「선덕여왕」 

 

요즘 세간에 인기리에 방영되는 드라마 「선덕여왕」를 보며 궁금증을 자아내는 내용이 있다.역사책에서 읽은 내용과 다르게 군데군데 허구가 삽입되어 흥미를 돋군다.이를 '팩션(Faction)이라 하여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로써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를 가리킨다. 주로 소설쓰기의 한 기법으로 사용되었지만 이젠 영화, 텔레비젼 드라마, 연극 등으로도 확대되는 추세이며 문화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선덕여왕은 과연 천명공주와 쌍둥이인지?

 선덕여왕은 결혼했는지,했다면 남편은 누구인지? 등의 궁금증을 풀어본다.

 

* '어출쌍생이면 성골남진이라' 

 '어출쌍생이면 성골남진이라' 는 그럴듯한 문장 하나가 사극 「선덕여왕」드라마가 팩션으로 흥미의 단초를 제공한다.임금이 쌍둥이를 낳으면 성골 남자가  씨가 마른다는 말을 만들어 극을 시작하면서 허구는 시작된다.원래 '성골남진(聖骨男盡)이라는 말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온다.진평왕과 마야부인 김씨의 소생으로 덕만공주가 '성골남진'(성골남자가 없음)으로 여왕에 등극한다고 씌어있다.게다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분명하게 덕만공주는 진평왕의 장녀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드라마에서는 덕만은 쌍둥이 중 둘째 아이로 태어남)

 

* 선덕여왕,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

 우리나라 역사상 고조선,삼국시대,고려,조선왕조를 통틀어 여왕은 단 세명이 배출되었다.그것도 신라에서 27대 선덕여왕(재위기간 632-647),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 그리고 51대 진성여왕(재위 887-897)이 그 주인공들이다.

선덕여왕의 등극은 중국 최초의 유일한 여제인 '측천무후'보다 반세기 앞서고, 일본의 최초 여성천왕인 ;스이코'천왕보다는 40년 후의 일이다. 

 

* 왜 여왕이 등극했을까?

 신라는 성골,진골 등의 골품제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왕은 성골에서 나와야 한다는 원칙에서 진평왕이 아들이 없고 딸만 있어 골품제때문에 성골인 딸이 여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 것이다.당시 여왕을 후계자로 삼는데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았다.그러나 진평왕 시절 일본과의 교류가 있었는데 일본에서도 스이코천왕이 여자인점도 감안되었으리라 본다. 

 물론 신라 상고대에는 왕이 아들이 없었을 때는 사위가 왕위를 잇기도 한 예가 더러 있다.4대 석탈해왕은 남해왕의 사위로 처남인 유리왕의 유언에 따라 즉위했다.13대 미추왕 또한 11대 조분왕의 사위로서 12대 점해왕에 이어 등극한다.후기에 와서는 48대 경문왕이 47대 헌안왕의 사위이고,53대 신덕왕은 49대 헌강왕의 사위이기도 하다.이처럼 딸이 아니고 사위가 대를 잇기도 했다.

 

* 선덕여왕의 '씨내리' 남자들

 <화랑세기>필사본엔 선덕여왕의 씨내리 남자 트리오에 대한 기술이 있다.여기에서 '씨내리'는 국어사전에 "예전에, 혈통을 이어 가는 자손이 아이를 낳지 못할 때에 다른 남자를 들여 아이를 배게 하던 일"이라고 정의되는 용어이다.잠깐 여기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원래 신라의 성 풍속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다.그 중에 삼서지제(三壻之制)라 하는 희안한 풍속이 있었다.글자 그대로 한 여자에게 남자 세명을 들인다는 뜻이다.진평왕이 아들이 없자 왕위 계승권이 문제가 된다.궁여지책으로 진평왕은 덕만공주의 씨내리 남자로 용춘.흠반,을제로 하여금 보좌케 했으나 모두 아들 만들기에 성공치 못한다.아마 덕만공주가 불임여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선덕여왕은 결혼했을까,했다면 남편은 누구일까?

 기록은 엇갈리지만 <삼국유사>왕력편에 보면 선덕여왕의 남편은 '음갈문왕'이라 되어 있다.여기서 '갈문왕'이란  왕과 가까운 남자친족에 붙는 명예로운 호칭이다.이 호칭은 왕과 왕비의 아버자 남동생 그리고 여왕일 경우엔 그녀의 남편에게 붙이는 호칭이다.여기서 선덕여왕의 남편,음갈문왕은 다름아닌 아버지 진평왕의 동생이다.그러니 선덕여왕은 삼촌하고 결혼한 셈이다.당시엔 골품제 유지를 위하여 근친혼이 성행했으며 이러한 풍습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근친혼의 예는 많이 나타난다.선덕여왕의 증조 할아버지 진흥왕의 경우도 아버지,어머니가 삼촌-질녀간이었다.

 그러나 <화랑세기>엔 진평왕의 명에 의해 용수,용춘공의 형제가 선덕여왕을 모시게 했다고 되어 있다.여기에서 모신다는 것은 성관계를 가졌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그런데도 그들사이에서 자식을 갖지 못했다.이런 행태는 당시 진평왕은 성골 골품을 유지하기 위해서,즉 성골 남자 자손을 얻기 위한 고륙책으로 추론된다. 당시 신라 왕실의 남녀관계는 골품제때문에 근친혼이 일반적이었으며 흠이 되지 않았다.

 선덕여왕이 용수,용춘 형제와의 관계가 남편 음갈문왕과 만나기 전인지 후인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아마 전이었지 않나 추론해 본다.

 

* 선덕여왕은 몇 살에 즉위했을까?

 선덕의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632년에 즉위했다고 되어있다.그 때 김춘추의 나이가 30세 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김춘추의 출생년도가 602년이니까 그의 어머니 천명공주가 20세에 출산했다고 가정하고(천명공주도 재혼한 상태였다) 언니 덕만과 두살 터울이라고 가정하면  얼추 50여세에 여왕으로 등극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겠다.등극 당시 그의 남편 음갈문왕은 노쇠했거나 이미 사망했는지도 모른다.그래서 여왕 등극이 자연스럽게 국인(國人)들에 의해 등극이 가능했다고 본다.

 

* 비담은 누구인가?

 선덕여왕 말년에 비담의 난이 발생한다.당시 직책은 상대등으로 지금의 국무총리격이다.비담은 진지왕의 아들로서 선덕여왕이 자식이 없기 때문에 다음 왕위는 자연이 자신한테 올 줄 알았는데 선덕여왕의 사촌자매인 승만공주(진덕여왕)를 후계자로 세우는데 대한 반감으로 난을 일으킨다.그러나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어 비담은 처형되고 선덕여왕도 조금 후 타계하고 대를 진덕여왕이 잇는다.   

 

 그 외에도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나 '칠숙'도 진평왕 말년에 이찬 벼슬을 달고 아찬 석품과 반란을 꾀하다가 처형된다.역사의 파노라마가 팩션이라는 장르를 통해 흥미진진하게 시청지를 사로 잡는 것은 좋으나,방영 내용이 역사의 진실인 양으로 오해되는 착각이 일어나 혼란스러운 것은 저으기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역사를 바로 알고 보면 비록 팩션이지만 사극은 더욱 재미있다.모르고 속으면 분하지만, 알고 속으면 가소롭지 않던가.「선덕여왕」드라마의 키워드는 단연 '어출쌍생(御出雙生),성골남진(聖骨男盡)'이다.참으로 기발한 문구 하나로 드라마를 끌어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