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면)경적을 울려다오,(비켜주마).. (Horn please) / 인도여행기
* 2013.01.03-01.10 / 델리(1)-바르나시(1)-카주라호(1)-아그라(1)-자이푸르(2)-델리
타지마할 / 무굴제국의 왕,샤자한이 그의 아내 뭄타즈 마할이 14번째의 왕자를 출산하던 중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그의 슬픔을 지우기 위해 22년간에 걸쳐 완공한 아내의 묘지...하얀 대리석에 그의 사랑과 영혼을 심은 위대한 건축물
(바쁘면)경적을 울려다오,(비켜주마).. (Horn please) 또는 (Blow horn) / 거의 모든 트럭에 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인도여행에 앞서
『인도에 미치다 』라는 책을 읽고
인도는 남한 면적의 33배(한반도 면적의 17배)에 11억 인구가 정부공용언어만 18개를 사용하는 나라이며,인구의 85%가 흰두교인인 나라다.기원전부터 인도는 그리스 로마인들에게 '황금의 나라'라고 알려졌다.고대로마시절 문인이며 철학자였던 키케로의 말처럼,'전쟁의 동력은 황금'이라는 명언을 인도는 고스란이 뒤집어쓴 역사를 갖고 있다.
황금의 나라,인도
기원전 326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인도를 침입한 이래,박트리아,스키타이,페르시아,투르크,흉노가 인도의 북부를 수천년 동안 쉼없이 침입해왔다.그들은 한결같이 인도의 '금'을 노렸다.많은 유적지가 폐허로 변하고,전리품으로 금은 보화와 인도인들을 노예로 잡아갔다.그야말로 피로 점철된 인도의 역사다.그러나 인도인들은 이런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슬픔의 역사이기때문일 것이다.그들은 슬픔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은 잊고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터득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인도를 찾은 거룩한 사람들도 있었다.석가모니의 불법을 찾아 동양의 구법승들은 5세기에 동진의 법현,7세기에 당나라의 현장 그리고 8세기 경엔 신라의 혜초가 불법을 구하러 머나먼 인도를 간다.1908년 둔황의 천불동에서 두루마리 종이뭉치가 하나 발견되었다.바로 그것이 그 유명한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 』이다.현재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있다.이 문서가 8세기 인도를 알려주는 현존하는 세계유일의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이고 보면 인도는 그들의 역사 기술에 인색하다.이처럼 동아시아의 승려들의 인도여행기가 인도의 역사적 자료가 드문 인도 고대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 셈이다.
침략,굴욕의 역사
언제나 전쟁은 잔혹하다.10세기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남서쪽으로 140km떨어진 가즈니에서 27세에 정권을 잡은 마흐무드는 27년 재임하는 동안 인도를 17차례나 침입 약탈했다.힌두사원은 모조리 파괴하고 금은보화는 실어가고 포로는 노예로 삼았다.그 뒤 몽골이 또 침략한다.그들이 약탈하고 떠나간지 100년이 채 안된,1378년12월엔 또 다른 무슬림 지배자,티무르가 가즈니의 뒤를 이어 인도를 정복하고 세워진 무슬림왕조,쿠글루크가 쇠퇴했다는 정보를 얻는다.60세 늙은이가 다 된 티무르의 노욕이 인도침략을 감행하여 또 다시 쑥대밭을 만들었다.300년뒤 또 다른 무슬림 통치자,나디르 샤가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황금을 찾아 인도로 왔다.그는 348년동안 무굴제국이 축적한 부를 단 사흘만에 차지한다.그리고 대학살과 파괴가 이어진다.그가 챙긴 전리품은 어머어마하다.
슬픈 델리의 굴욕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병은 '탐욕'이라고 했다.탐욕은 그 끝이 없기때문이다.인도는 황금때문에 수세기에 걸쳐 침략과 약탈을 당했다.최근세만 보더라도 1739년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델리를 침략하여 폐허로 만들고 타지마할보다 더 제작비가 들었다는 공작옥좌와 엄청난 재물을 실어갔다.그 후 무굴의 수도 델리와 인도 북부는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침입과 힌두 마라타 연맹의 유린으로 또 한 차례 폐허가 된다.그 후 다시 투르크와 아프가니스탄,몽골과 페르시아의 침입을 받고 약탈당하는 굴욕의 역사는 반복적으로 계속된다.1600년 동인도회사를 첫발로 내디딘 영국은 무역 대행업을 끝내 1795년 영국의 지배통치로 바꾼 200년의 통치세월이 또 인도를 슬프게 만들었다.
이 외에도 이 책은 인도에 사로잡힌 이방인들이 겪는 매혹적인 인도생활사를 담고 있다.포루투칼인 바스코다 가마가 인도를 찾고 네델란드와 영국이 무역을 핑게로 인도를 찾는다.탐욕의 끝은 허무하다.그 많은 굴욕의 역사 속에서 인도는 살아남아 세상사람들에게 영적인 선물을 안기는 나라가 되었다.오랫만에 책장 넘기는 시간이 즐거웠다.인도를 알고자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강추한다. (2012.11.29)
2013.01.03,13:15. 영하16도의 서울 날씨를 뒤로 하고,인천공항을 출발한 인도항공 AI 317기는 델리로 향한다.머나먼 여정이 될 것이다.중간에 홍콩을 경유한다.홍콩까진 2068km로 4시간을 비행한 후에야 홍콩공항에 착륙했다.비행기 안에서 꼼짝없이 한 시간 30분을 대기하는 동안 소설책을 읽어야만 했다.청소와 보안점검을 끝낸 비행기는 다시 델리를 향해 나른다.기내식이 나오고,와인 한 잔으로 잠을 청해 보지만 하늘길이 멀다.다시 식물관련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야 우리나라 시각으로 새벽 1시 (인도시각 21:30)에 안개 낀 델리공항에 내린다.무려 4200여 km 거리를 6시간 나른 셈이다.결국 10시간을 탄 셈이다.결혼 36주년 기념일에 하루종일 비행기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델리에서 호텔까지 자욱한 밤안개 속을 헤쳐나간다.현지가이드 산토스라는 친구가 어눌한 한국말로 간단한 일정소개와 인도문화를 설명하지만 귀에 낯설 뿐 들어오지 않는다.대충 샤워하고 인도시각으로 자정(한국시각 03:30)이 넘어서야 잠을 청한다.
과연 이번 여행에서 야누스의 얼굴을 한 인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자못 기대가 된다.
델리에서 바르나시로 로칼비행기 또 타다
인도 땅은 워낙 넓다.이번 여행 코스가 북부 인도 중심으로 짜여져 있으나 너무 넓은 탓에 델리를 마지막 날 관광하기로 하고 바로 새우잠을 자고 다음 날 델리에서 바르나시로 로칼비행기를 또 탄다.버스로 가면 10시간 쯤 걸리는 길을 비행기로 1시간 10여분만에 도착한다.바로 부처님 초전 법륜지,녹야원의 탑,'다멕스투파'를 본다.녹야원은 인도내 불교 4대성지의 하나로 초전법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다멕스투파가 돔 형식으로 세워져 있다.불교 예술의 보고인 사르나트 박물관을 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쉽다.금요일은 휴관하기 때문이다.공교롭게도 바르나시 체류하는 날이 금요일이다.
사이클 릭샤를 타고 갠지스강가로 간다.도로가 협소하고 많은 인파로 인해 버스가 들어갈 수 없다.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릭샤까지 인파와 휩쓸려 거대한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그러나 용케도 사고 없이 경적을 울리며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간다.
갠지스강가에 이르자 우릴 제일 먼저 반기는 사람은 거지 떼다.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구걸하는 이가 너무 많아 기분이 많이 언짢다.출국 전에 작은 기부용으로 쓸려고 1달러짜리 환전을 많이 했다.그러나 여기와서 생각을 바꾸었다.낮에 바르나시 공항에 내리자 공항 버스 정류장에 하나,둘씩 구걸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현지 가이드를 빼고 그들이 우리가 인도에 와서 만난 첫 인도사람들이다.북쪽의 꽃제비가 연상되었다.
힌두교인들의 성스러운 강,갠지스 강
갠지스 강은 인더스 강과 함께 인도 문명의 발상지이다.이중 갠지스 강은 힌두교도들에겐 윤회의 강이고 삶의 현장이다.종교의식이 이루어지고,목욕하고 빨래하며 죽은 자의 화장터 역을 하는 삶의 터전인 강이다.시바신의 아내,'강가이'가 바로 갠지스 강의 여신이다.향내가 진동하고 제단에선 브라만의 제의식이 요란하다.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가니 여기저기 가트에서 화장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인도의 겨울 강바람이 스산하다.배 사이로 꽃등이 떠나간다.망자의 영혼이 극락으로 갈 수 있도록 꽃불을 띄워 소망을 빈다.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하는 곳,갠지스 강은 어둠 속에서 바르르 떨고 있다.종교를 버린 나에겐 모든 게 미신으로 보여졌다.그러나 신도들에겐 희망이요 소망의 강일 것이다.비신도들에겐 성찰의 강이었으면 싶다.호텔로 돌아가는 릭샤안에서 잠시 인도에 대한 선입견을 버린다.
'너는 누구냐?'인도의 거리에서 내게 물었다.그러나 대답을 하지 않자 계속 묻는다.나는 항변한다.'이순을 넘긴 내 나이에 좌절된 꿈으로 꼭 내 무릎을 꺾어야만 되겠는가'라고.
갠지스 강 일출 대신 본 새벽 광경
호텔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서둘러 갠지스 강으로 간다.일출을 보러 가지만 안개가 자욱하다.대신 조용한 갠지스 강의 새벽풍광을 본다.어제 낮과는 달리 꼭두새벽이라 한가하다.그러나 새벽부터 구걸하는 어린이와 노인들이 달라붙는다.현지가이드가 큰소리로 좇지만 그네들도 만만치 않다.인도에서는 불쌍하다고 한 사람한테 적선하면 거지들이 떼로 달라붙는다.사탕을 나눠줘도 역시 마찬가지로 더 달라고 떼를 쓴다.우리 어릴적 미군트럭이 지나가면 '기브 미 어 껌 또는 기브 미 어 쪼끄렛'하던 생각이 났다.강가에 이르자 힌두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어 목욕을 한다.
목욕재계하고는 브라만이 주제하는 자리에 앉아 설법을 듣는다.목욕은 발가벗고 하는 게 아니고 옷을 입은 채로 물 속에 들어가 몸을 씻는다.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내가 갑자기 강가로 내려선다.여기까지 와서 갠지스 강 물이나 만져보고 가겠단다.그러자 동행하던 서너명도 함께 성수를 만진다.나는 갠지스 강물을 만진 아내의 손을 만지는 것으로 대신한다.
고진감래 여행이라고?
갠지스 강을 둘러본 후 다시 시내 바라나시관광을 한다.인도의 힌두대학의 깨끗한 교정을 버스투어로 둘러본다.처음으로 인도의 깨끗한 거리를 본다.두르가 힌두사원에 들러 현지인들의 참배광경을 바라보고 그들의 신앙을 들여다본다.다음 행선지는 카주라호다.버스로 12시간을 간다.중간에 중식하느라고 한번 휴식하고,오전 오후 한차례씩 벌판에 내려놓으면 여성들은 돌담 뒤로 숨고 남성들은 벌판을 향하여 작대기를 받친다.인도 땅이 워낙 넓다보니 곳곳의 하일라이트만 본다고 짜여진 여행프로그램이라 보통 하루에 250여 km는 이동하는 셈이다.시골길이라 길이 좁고 도로포장 상태가 좋지 않아 시속 50km를 넘길 수가 없다.요철구간도 많고,비포장도로 보다 더 못한 도로도 있다.여행사에서 왜 고진감래여행이라고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차창 밖의 시골풍경에 시선을 둔다.도로변엔 가로등 대신에 가로수에 야광페인팅으로 밤길을 밝힌다.창 밖 시골마을 지날 때엔 아낙들이 어김없이 땔감을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가도가도 카주라호는 멀다.주 경계를 두 세개쯤 넘고서야 밤 늦게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다.
(바쁘면)경적을 울려다오,(비켜주마)
카주리호로 가는 국도는 길도 거칠고 좁다.버스는 드물고 대형 트럭이 많다.그들은 울긋불긋 치장한 트럭을 몰고 줄지어 도로를 달린다.서로 경적을 울려대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먼 길을 달린다.그런대 하나같이 트럭 뒤에 'Horn please 또는 Blow horn'이라는 문구를 달고 다닌다.'바쁘면 경적을 울려다오.그러면 비켜주마'라는 뜻이다.내가 상상할 수 없는 경적의 역발상을 본다.
카주라호의 남녀교합상이 예술이라고?
작은 시골도시에 사원군이 동서남북으로 4개가 있다.그 중 2개의 사원군이 개방되어 있다.신과 인간이 만나는 성스러운 사원이라고 광고한다.건축물들이 대부분 10세기와 11세기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캄보디아의 작은 앙코르왓을 연상케 한다.사원 벽면에 남녀교합상들이 조각되어 있다.그룹섹스(plural intercourse)조각상들이 시선을 잡아끄는데 인도의 요가 84가지를 터득하지 않고는 그런 교합 체위가 나올성 싶지 않다.사람들은 이를 에로틱예술의 정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나는 이들 교합상에서 종족번식이 아닌 말초신경 향락의 극치를 보았다.일반적으로 식물에겐 수분이라는 암수교합은 종족번식이 맞다.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에겐 암수교합이 종족번식은 부차적인 수단일 뿐,향락이 주기능일 것이다.
싸땁타 특급열차를 타고 아그라로
카주라호의 눈요기를 끝내고 아그라로 이동하기 위해 잔시까지 172km의 길을 4시간 걸려 차량으로 이동한다.다시 잔시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아그라까지 두시간 30분을 달린다.그런대 문제는 기차연착이다.버스로 열차 시각에 대어 잔시로 왔지만,열차는 거의 출발시각보다 세시간 가깝게 연착했다.인도에선 열차 연착은 일상다반사라는 설명이 돌아왔다.특급열차라서인지 간식과 도시락이 배달된다.이 열차를 타는 인도 현지인은 그래도 어느 정도 돈을 가진 자만이 타는 듯 승객들이 거들먹거리는 폼새로 보였다.내 앞에 앉은 중년부인이 그렇고 아이들도 아이패드로 연신 게임을 하고 간다.옆 인도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다.수프가 나왔는데 무슨 수프인지 소금을 쳐 먹기에 그 이름을 물었다.토마토수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내가 소금을 많이 첨가했기 때문에 전혀 토마토 수프 맛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아그라에 대한 이런저런 애기를 나누다가 헤어진다.
자정을 넘어 호텔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한다.난 반주 한 잔을 식사 대용으로 들고 잠자리에 든다.몇 시간 후엔 아름다운 아그라성과 사랑의 무덤,타즈마할을 관광할 것이다.
천국의 정원,아그라성(Agra Fort)
개인적으론 아그라성의 규모에 놀라고 건축미에 또 한번 놀랐다.무굴왕조의 3대왕에 걸쳐 디자인되고 건축되었다.이곳은 사자한이 그의 아들,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되어 8년간 남은 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그는 여기에서 2.5km떨어진 곳.강 건너마을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그의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인생무상을 느꼈으리라.사진기행으로 대신한다.
나란히 달린 문의 문양이 각각 다 다르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 타지마할
여행 중 유적지와의 만남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선지식들과의 만남은 가슴벅찬 즐거움이기도 하다.무굴제국의 왕,샤자한이 그의 아내 뭄타즈 마할이 14번째의 왕자를 출산하던 중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그의 슬픔을 지우기 위해 22년간에 걸쳐 완공한 아내의 묘지...하얀 대리석에 그의 사랑과 영혼을 심은 위대한 건축물,타지마할은 대리석 건축물의 제왕격이다.규모와 정교함에 놀란다.타지마할 뒷편을 유유히 흐르는 야무나(Yamuna)강은 옛 영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물줄기를 줄이며 흘러가고 있었다.
이주향은 그녀의 글,<그림 너머 그대에게>에서 '주고 또 줘도 아깝지 않고,받고 또 받아도 어색하지 않은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라고 정의한다.강대한 힘으로도,계락으로도 멈출 수 없는 지고지순의 사랑,그것이 마법의 사랑 아닐까.그러나 사자한의 그녀에 대한 막무가내 사랑은 훗날 남자들의 불편한 심기를 왜 몰랐을까?
자이푸르의 암베르성
자이푸르는 인도의 델리와 아그라와 함께 인도여행의 삼각편대를 이루는 트라이앵글로 표현한다.어젯밤 아그라 관광을 마치고 다시 버스로 다섯 시간을 걸려 자이푸르로 왔다.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이젠 시간 관념에선 어느 정도 놓여났다.인도여행에서 기다림,가르침,no problem 이 세가지의 기본 개념을 마음에 새긴 채 여행하면 덜 지루하다는 현지가이드의 말이 수긍이 된다.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그들을 느긋하게 만드나보다.압축성장을 경험한 우리가 과연 이런 경지에 익숙하려면 달관의 경지에 드는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자이푸르를 핑크시티라고 소개한다.모든 건물이 핑크색이다.18세기에 만들어진 분홍색의 계획된 도시다.라자스탄주의 주도이기도 하다.먼저 암베르성에 올랐다.코끼리를 타고 오르는 것을 피하고 우린 찝차로 이동했다.암베르성은 1037-1726년간에 카츠와하 왕조의 수도였다.1592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8세기에 완공이 되었으니 150여년간 공사가 진행된 셈이다.벽면 문양이 다양하고 독특하다.힌두교,이슬람교,기독교 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왕궁여인들이 격자형 창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 / 하와마할
세상 밖 출입이 제한되었던 중세 왕궁의 여인들의 삶은 얼마나 답답했을까?그들은 암베르성에서 도심지 하와마할까지 지하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이동한다.하와마할의 격자창문을 통해 세상 밖을 구경하던 왕궁의 여인들을 상상해본다.라자스탄의 궁녀들의 슬픈 삶을 들여다보는 듯해 코끝이 찡했다.하와마할을 바람의 궁전이라고 한 이유는 격자창을 통해 세상의 바람을 통했던 이유이기도 했을 것 같다.
* 헤나 문신 / 공작
델리가는 길에
역시 자이푸르에서 델리까진 258km로 버스로 다섯 시간이 걸린다.새벽에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새벽 4시에 울리는 모닝콜에 이젠 익숙해졌다.동행인들은 버스 이동시마다 잠을 청하지만 나는 차창밖 풍경에 눈을 둔다.그러나 여행 8일째라 피로가 쌓인 탓에 델리 가는 길엔 깜박깜박 졸곤 했다.졸다 깨어 보면 너른 유채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여명에 이상한 광경을 여러차례 목격한다.농촌마을에서 남자가 1.8L 물병을 들고 밭 속으로 사라진다.트럭에서 정차한 트럭 기사도 물병을 들고 숲 속으로 사라진다.아낙도 왼 손에 1.8L 페트병을 들고 도로를 걷고 있다.모두 공통점은 왼 손에 1.8L페트병을 들고 둔덕 너머로,밭으로 간다는 것이다.아! 위대한 발견이다.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볼 일 보러 가는 것이다.휴지를 사용하지 않고 물로 비데를 하는 것이다.어디메쯤에서 한 남자가 물병을 옆에 두고 쪼그리고 앉아 볼 일을 보고 있는 광경을 보고서야 알았다.넓은 대지에 소똥 개똥 사람똥으로 꽉 찬들 노 프로블럼이다.
꾸뜨브 미나르는 전쟁의 슬픈 역사를 나타내고
델리에 와서 꾸뜨브 미나르를 먼저 찾았다.72.5m의 높은 승전탑은 무굴제국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무굴제국 600년의 영광과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 우뚝 우람한 모습으로 폐허 속에 서 있다.힌두사원의 폐허 위에 이슬람의 호전성이 베어 있는 듯 하다.1193년 무슬림은 델리에 마지막 힌두 왕조를 무너뜨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승전탑을 세웠다.그것도 모자라 같은 구역내에 그 두 배가 되는 탑을 조성하다가 왕이 죽는 바람에 중지한 탑도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16세기에 바브르가 세운 무굴제국은 후마윤,아크바르,자한기르,사자한,아우랑제브로 이어지는 무굴의 영광은 인도에 유적과 유산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타지마할,아그라성 모두 무굴제국의 영광이자 슬픈 유물 유적이다.인도는 11세기에 이슬람세력을 만난다 16세기에는 영국의 통치를 받으며 기독교 세력을 또 만난다.600년간의 이슬람통치와 200여년간의 영국통치후 종교적인 갈등을 빚어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기에 이른다.슬픈 델리의 역사는 비극으로 치달은 셈이다.
쿠뜨브 미나르를 관람 후 붉은 성(랄 낄라)를 차창관광하고 대통령궁 등 인도의 심장부를 돌며 차창관광을 이어간다.델리에서 마지막으로 연꽃사원이라 불리는 힌두사원 바하이 사원을 둘러보고,인도에서 가장 크다는 이슬람사원인 자마 마스지드를 둘러본다.자마 마스지드 사원에서 멀리 붉은 성을 바라보며 인도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지금 여행기를 정리하는 동안 갑자기 자이푸르에서 델리까지 동행한 눈썹같은 그뭄 달이 생각난다.델리 오기 전 어디메쯤엔가 까지 동행하던 그뭄 달은 일출에 좇겨 푸른 하늘가로 밀려났다.그러다가 델리에 다달을 쯤 그 모습을 숨기고 만다.'다시 서울에 가서 비춰다오'라고 한 독백까지 이 순간 생각난다.벌써 인도 여행은 내 생활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마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