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문장대와 복천암 신미대사 이야기 / 190526
* 190526 / 화북분소(09:52)-문장대-복천암-세심정-법주사-속리목욕탕(14:55) ... 약 12 km
5월의 숲은 검푸르다
누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는가.그 찬사가 절묘하다.5월의 숲은 바라만 보아도 환상적이다.신록은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기분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다.감성을 자극한다.오감을 열게 한다.오늘은 산악회 산행에 손주 둘을 대동한다.꼬맹이들에게 속리의 산세를 보여 주고 싶었다.북한산,도봉산도 올라 본 터라 크게 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숲 속을 지난다.국수나무며 함박꽃나무랑 꽃이 핀 나무들을 중심으로 설명해주며 산길을 오른다.오늘 산행이 먼 훗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아름다운 속리산을 산행하며 멋진 추억 쌓기가 되었으면 싶다.오직 아이들이 산과 자연과 친숙해지길 바랄 뿐이다.속리도 아이들을 반길 것이다.작은 넘이 문장대 오르는 숲 속 볕뉘에서 하트모양을 발견하고 소리쳤다."할아버지,하트모양하고 똑 같죠"."그러게,네가 그렸니?" "어디,어디".큰 넘이 숨은 보물찾기에 나섰다.아이들은 신이 났다.하산하는 산님들로부터 '화이팅'하라는 격려를 받으니 더욱 신이 나는가 보다.드디어 문장대에 올라 사위를 돌아보며 기뻐한다.저희들도 뿌듯한가 보다.
한글창제의 주역,복천암 신미대사
속리산의 주봉은 천왕봉(1,058m)이다.문장대(1,054m)는 두번째 높은 봉우리다.사람들은 '일생동안 문장대를 세번은 올라야 극락에 간다'는 속설을 지어냈다.산자락엔 조선 초기시대의 학승,신미대사가 주석했던 복천암이 있다.세종대왕이 훈민정음 반포 8년 전에 그가 이미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학설이 논쟁거리이기도 하다.조선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정도전과 함께 군신양립의 국가체계를 설계해 세운 나라다.고려의 불교숭상정책에서 숭유억불정책으로 바꿨다.그래서 신미대사를 드러내놓고 숭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세종이 승하하기 전 병 문안차 궁궐에 들어 온 신미대사에게 '혜각존자'라는 호를 하사하려 하나 내리지 못하고 죽는다.세종의 유지를 받아 그 호를 아들,문종이 하사한다.이런 기록들을 미루어 짐작컨대 불교숭상은 유교를 숭상하는 유생들과 집현전 학사들때문에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불교와의 마찰이 여간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조선초기 왕권과 신권의 병립관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복천암에서 그의 영정을 뚫어지게 바라본다.그는 당시의 여러 흔적으로 보아 한글 창제의 산파역을 담당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복천암 절집엔 공양왕이 쓴 친필,무량수(無量壽)현판이 있다는데 깜박하고 놓쳤다.복천암 절집이 우리를 배웅한다.
속리산은 세조와도 관련이 있다.그가 요양차 속리를 찾은 탓이다.그가 걷던 길을 '세조길'이라 하여 트레일을 만들어 걷기도 한다.우린 오늘 세조길을 하산길로 삼는다.세심정휴게소에선 스님 한 분이 생음악으로 산님들에게 음악 보시를 하고 있다.
법주사엔
국보 세 점이 있다.제5호 국보인 '쌍사자석등',제55호인 '팔상전',제64호인 '석련지'가 그것이다.경내를 돌며 손주들에게 문화유적들을 설명해준다.문화해설사 한 분이 곁에서 해설을 도와주신다.아이들에게 1급수에서 자라는 '갈겨니'를 설명해 주니 큰넘은 귀를 쫑긋 세운다.
큰 넘은 미래에 생물학자가 되는 게 꿈이다.그는 요즘 배추흰나비 애벌레를 얻어다 부화시켜 날린 경험이 있다.방이습지 선생님으로부터 새끼누에 몇 마리를 분양받아와 뽕잎을 먹이며 잠을 재운 후 누에고치를 만든 모습들을 관찰하는데 흥미가 있다.나도 큰 넘이 생물학자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작은 넘은 자기가 축구반 에이스라며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데 '글쎄'다.작은 넘도 자연친화적인 직업을 가졌으면 하지만 모두가 저희들 몫이 아닌가.
-
복천암과 신미대사
“신미(信眉·1403~1480) 대사가 주지로 있던 복천암은 한글창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도량이다. 복천암 사적기에 ‘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한글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미(본명 김수성) 대사의 동생인 집현전 학사 김수온이 쓴 복천보강, 효령대군 문집, 조선실록 등 각종 자료를 보면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산파 역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이 한글창제 후 불경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대사의 영향이며 언해할 서책이 많은데 굳이 불경부터 한 것은 신미대사의 요청 때문이다. 집현전에는 불교를 배척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세종은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스님을 보호하기 위해 신미대사가 실제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이미 17년 전 ‘영산김씨 대동보’는 이런 요지의 기록을 남겼다. (출처 ;신동립의 ‘잡기노트’ <465>에서 인용)
손주들과 걷는 5월의 속리 숲길은 싱그럽다.숲이 살짝 가린 하늘은 청명했다.그 사이로 햇살 한줌이 선사하는 볕뉘를 즐겼다.
문장대에 오르는 아이들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문장대는 아이들에게 속리의 넉넉한 품을 선사했다.고마운 자연이다.
사진모음
휴게소에서의 아침식사
▲ ▼ 최 ㅇ 수 님이 카톡으로 보내준 사진 / 감사합니다
작은 넘은 문장대 오를 때 바위를 타는 줄 알았는데 계단이라며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이 두 치는 나왔다.옛날엔 계단이 없어 기어 올랐는데 계단이 놓인 줄 몰랐다고 변명하자,작은 넘 왈,"할아버지는 신(神)이라며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준다. ㅎ ㅎ
작은 넘이 정말 나를 신이라 여겼을까.
▲ 김ㅇ 태 님이 카톡으로 보내준 사진 / 감사합니다
바위에서 자라는 소나무 연리근
복천암
복천암 극락보전에 안치된 신미대사 영정
'손주들과 함께 한 호연지기의 산과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안 압해도 송공산 / 200219 (0) | 2020.02.20 |
---|---|
익산 배산 설경 / 200217 (0) | 2020.02.17 |
서울 도봉산 찬가 / 190419 (0) | 2019.04.20 |
아차산 (0) | 2018.06.06 |
북한산 족두리봉 / 바위 타러 가요 (0) | 2018.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