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단상(斷想)

-산모퉁이 돌아 바로 송광사 있거늘, 뭘 그리 구불구불 깊은 산 속 헤맬꼬

천지현황1 2008. 4. 14. 01:29

 -산모퉁이 돌아 바로 송광사 있거늘, 뭘 그리 구불구불 깊은 산 속 헤맬꼬 (순천 조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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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13 / 오륜 제798회차 / 송태영 고문님 600회 기념 축하산행

*  선암사 주차장(10:24)→ 선암사 →대각암 →행남절터→조계산정상(장군봉)→ 배바위→

            작은 굴목재→보리밥집→대피소→천자암→ 운구재→송광사→송광사매표소 주차장(16:02)

* 추천코스 :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아래 산행개념도 붉은 색 코스 강추 (약 18km 7~8시간 정도 소요,휴식포함)

* 오늘 산행코스 : 노란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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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부산일보

 

 몇 해 겨울 어느 남도 여행길에서 벌교,보성을 돌아 늦은 밤 도착한 선암사 아랫마을 민박집에서 오들오들 떨며 지새운 추억이 생각났다. 다음날 아침 선암사를 들려 낙안읍성으로 넘어가는 낙안온천탕에서 몸과 마음을 녹인 일이 생각나 요즘 장기 연수로 바쁜 아내에게 지난 추억도 선물할 겸 선암사가 있는 조계산 산행을 같이 가자고 말을 건네본다.그녀도 그 때 그 추억이 그리웠던지 선뜻 동행을 허락한다.

 

 오늘 산행코스는 선암사를 깃점으로 조계산 장군봉을 올라 송광사까지 종주하는 연계산행인데 기획한 코스가 연계코스중 백미코스다.그러나 나는 고민이 시작된다.나 홀로라면 정해진 시간내에 그 코스를 두루 섭렵할 수 있지만 오랫만에 아내와 동행하며 시간에 쫓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산행대장에게 허락을 구하고 우리 둘만의 코스로 여유롭게 보고 싶은 곳 보며 느긋하게 즐기기로 조정한다.선암사 뒷간에서 속세의 근심도 털어내 보고 선암사 굴목재도 걸어보고 싶고 무엇보다 천자암에 있는 쌍향수도 보고 싶다.그렇다면 시간관계상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을 포기할 수 밖에 없을 듯하여 못내 아쉽다.그러나 어쪄랴.코스를 조정해 장군봉에서 배바위를 거쳐 보리밥집으로 내려 송광굴목재로 가로 질러 천자암을 만나러 갈 수 밖에.그렇게 코스를 잡으면 선두조와 30여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순천 조계산(883m)은 

  
 본래 이름이 청량산이었으나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불렸으며 대각국사 의천이 이름을 조계산으로 바꾸었다. 바위가 없는 전형적인 육산이다.산세가 수려하지는 않지만 동쪽 기슭에는 선.교종의 중심사찰인 선암사(仙巖寺)가 있다.조계산 서쪽 기슭에는 삼보사찰의 하나인 송광사를 품고 있어 사찰산행과 사찰여행지로는 그만이다. 
조계산은 호남정맥에 속한 산으로 3정맥 분기점인 조약봉에서 시작하여 호남 내륙을 관통한 약 430km의 산줄기중 내장산, 추월산, 강천산, 무등산, 제암산을 거쳐 조계산으로 잇다가 백운산과 망덕산을 거쳐 광양만 외망포구에서 그 맥을 다한다.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주암면 일대에 걸쳐 있으며 오래된 활엽수림과 단풍나무가 많아 철 따라 경관이 뛰어나고 사계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여행지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피아골·홍골 장밭골 등의 깊은 계곡과 울창한 수림·폭포·약수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선암사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고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거의 폐사로 방치된 것을 1660년(현종 1)에 중창하였으나 영조(英祖) 때의 화재로 폐사된 것을 1824년(순조 24) 해붕(海鵬)이 다시 중창하였다.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의 당우가 남아 있지만 그전에는 불각(佛閣) 9동, 요(寮) 25동, 누문(樓門) 31동으로 도합 65동의 대가람이었다.특히 이 절은 선종(禪宗)·교종(敎宗)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松廣寺)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修鍊道場)으로 유명하다. 
 

 365일 꽃이 지지 않는 산사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만다라”와 “아제아제 바라아제”,“취화선” 등의 영화가 촬영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고로 깊고 오래된 화장실인 뒷간(해우소)과 800년 전통의 야생차밭, 그리고 자연석을 무지개처럼 이어놓은 승선교(보물400호)가 유명하고 주요문화재로는 신라 때 이중기단 양식의 삼층석탑(보물395호)과 웅장한 대웅전(전라남도유형문화재 41호)이 있다. 
 

  

 

 

 

 

복원된 선암사 승선교 -  대표적인 아름다운 돌다리 

 
 승선교는 홍예(무지개 다리)이며 조선 숙종 39년(1713년)에 호암화상이 6년여 공사 끝에 완공한 길이 14m, 높이 4.7m로 보물 제400호.
무지개다리 사이로 보이는 강선루는 선경이다. 선녀가 목욕하고 강선루에서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승선교는 아름다움의 극치다.

 

 

 선암사 삼인당(三印塘)  

 

 삼인당은 긴 알 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1980년 전라남도기념물 46호로 지정되었다. 도선(道詵:827-898)이 축조한 것이라 전하는데 부처님의 말씀인 삼법인(三法印)을 줄여 지칭한 것이다. 삼인(三印)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精印) 즉,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존재하는 것 또한 무아임을 깨닫는다면 일체의 속박과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한다는 불교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선암사 해우소 '뒤깐'에서 속세에서 가져온 근심이나 털어내 볼까


 시인 정호승은 마음이 심란할 때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근심을 풀어라는 시 한구를 지었다.“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고 읊은 바로 그 해우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워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400년이나 된 그 해우소는 일주문을 들어서면 좌측 성보박물관 옆에 있다.짬을 내어 필자도 여기에서 근심을 털어내는 체험을 해보려고 해우소에 들렀다.그런데 근심을 털어내려 해보지만 시간관계상 바지춤을 내리지 않고 나무창살 밖 모습만 바라보다 해우소를 나왔다. 

정호승의 시 <선암사>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바지춤을 내리고 앉아 나무창살 밖을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저절로 근심을 털어낼 수 있을 듯 싶다

 다음 기회에 선암사에 들리면 꼭 체험 한번 해 보리라 다짐하며 뒤깐을 나선다  

 

 배바위에 올라

  

 

                   
배바위앞 안내판엔 다음과 같은 배바위 전설이 적혀있다. 

배 바위는 조계산에서 보기 드문 귀한(?) 바위로
옛날에 온 세상이 물에 잠기는 대 홍수가 발생하자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처럼
사람들이 가축과 농작물씨앗을 배에 싣고 물이 차오르자 이곳 바위에 배를 묶어
물이 빠질 때 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살아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고 한다.  
 
 작은굴목재에서 보리밥집 내림길엔 산죽 오솔길이
 
 일행은 장군봉에서 정상행사와 중식을 마친 뒤 장밭골 삼거리능선길을 돌아 송광굴목재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하는데 아내와 나는 배바위 내림길을 택해 천자암봉 가는 길로 접어든다. 배바위를 지나 작은 굴목재까진 가파른 내림길이지만 작은 굴목재부터 1.3km의 산길은 산죽길로 운치가 넘쳐나고 계곡의 시냇물은 졸졸졸 봄을 노래하며 동행한다.노랑제비꽃이 간간이 오솔길 돌밭에 피어있고  얼레지꽃이  수줍은 듯 얼굴을 땅 표면으로 다소곳이 숙인 채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다.
 
 보리밥집엔 산객들로 빼곡하다.다시 선암사굴목재에서 송광굴목재 가는 길로 접어드니 호젓한 산길이 걷기에 기분이 좋다.대피소를 지나니 또 산죽길이 우리를 마중한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산죽길을 걸으며 붉은 진달래꽃을 만날 때면 아내는 진달래 꽃 한 장을 내 입에 물린다.어릴 때 기억을 회상하며 입 맛을 다신다.그리고 계곡을 건널 즈음 난 스틱으로 아내에게 물장구를 친다. 그리고 다시 산죽길을 걷는데  부부산행 사랑거리 5m 안팎을 지키며 따라오던 그녀가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흥얼거리는 노랫말에 덩달아 추억 속으로 침잠하며 그 긴 산죽길을 걸어 천자암봉을 넘는다.

 

 


 
 
 천자암의 쌍향수 (松廣寺의 곱향나무雙香樹) - 천연기념물   88호

 천자암봉을 넘어 천자암에 당도하자 아름다움을 뽑내며 쌍향수가 서 있다.한 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연산봉을 돌아 천자암으로 내려온 우리 일행과 조우한다.천자암의 곱향나무 쌍향수는 수령 약 8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12.0m,  4.10m이다. 두 그루가 쌍으로 나란히 서 있고 줄기가 몹시 꼬인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담당국사는 왕자의 신분으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나무의 모습이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 절을 하고 있는 듯하여 예의 바른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산모퉁이 돌아 바로 송광사 있거늘
 
 송광사는 1200년 전 신라말엽 혜린선사가 송광산 길상사로 창건하였다. 그후 고려명종27년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정혜결사(定慧結社)의 도량으로 정하고 가람을 크게 중창 조계산 수선사라 개칭하였으며 당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고 열여섯 명의 국사 등 수많은 고승을 배출하면서 고려말에 이르러 절 이름을 다시 송광사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또한 송광사(松廣寺)는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로 불리고 있으며 우리나라 불교의 전통승맥을 계승한 승보사찰로 유명하다. 삼보(三寶)란 佛,法,僧 즉, 부처님(佛)과 가르침(法), 그리고 승가(僧)를 의미한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불보사찰(佛寶寺刹) 해인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송광사는 많은 고승을 배출하여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기에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 한다.
 
 송광사 절내를 돌며 가람배치가 오말조밀함을 느낀다.성보박물관에 들러 '능견난사' 등 국보급 보물 등을 둘러보고 담양사우나에서 몸을 씻고 담양 쌍교 송강정 옆 <쌍교 메기찜>집에서 별미를 맛 보고 밤 늦은 귀경길에 오른다. (2008.04.13)
 

 

 

송광사 능허교(凌虛橋)와 우화각(羽化閣) 
 

다리위에 세워진 우화각이 개울물에 비추어진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우화란 우화등선(羽化登仙) 즉 날개가 생겨 하늘을 날아올라 신선이 된다는 뜻이니
나도 능허교 우화각에 서면 등선할 수 있을까
마음이 곧 부처라던데

 

 

 

 

 
 

 

  

송광사의 비사리구시 
 
옛날 남원의 송동면 세전리에는 수령이 8백년이 넘은 비싸리나무가 있었다.
조선 경종4년(1724년) 갑진년에 태풍으로 인하여 이 비싸리나무가 쓰러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비사리나무를 세 토막으로 나누어 전국의 유명한 사찰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 중 제일 큰 밑둥을 곡성의 도림사로 운반하려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움직이지 않았다.
또 다시 구례의 화엄사로 운반하려 했으나 역시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그만 포기했다.
고심끝에 마지막으로 순천의 송광사로 운반하려고 계획을 세우니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하여
이 비사리나무는 이곳 송광사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운반된 비사리나무는 부처님의 공양을 마련하는 절간 주방의 구시로 만들어졌다.
이 구시는 영조이후 송광사에서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때마다 많은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밥을 퍼 놓는 밥솥으로 사용되었는데 쌀7가마니(약 4천명분)의 밥을 지어 담을 수 있으며
송광사의 3대명물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