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바람따라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천지현황1 2008. 7. 27. 16:21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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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7.26

* 서울 봉은사 주차장(07:10)-오대사 상원사-적멸보궁-상원사-귀가(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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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김준호형 부부가 저녁 산책 길에 주말에 봉은사 신도들의 오대산 상원사 성지 순례 길에 동참을 권유해왔다. 그래서 쾌이 승낙하고 오대산 상원사 광명법회에 동행하게 되어 7:00 경 봉은사를 출발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차량 두 대는 조계사를 출발하여 이곳 봉은사 신도를 더 싣고 세 대가 오대산을 향하여 출발한다. 불자도 아니고 이젠 종교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처지이다 보니 모든 게 호기심과 유람으로 치부된다. 그래도 나는 종교는 버렸다지만 호기심만은 아직 버리지 못했나보다. 

 

*상원사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 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 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좇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 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이색(李穡)의 ' 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 ' 에는 고려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英露庵) 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고 적혀있다. 고려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權近) 에게 명하여 '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 에 젖게 하라 ' 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조와 상원사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근세에는 방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온 뒤로 상원사에서 이십칠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수도 정진하였으며 수련소를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오늘날에도 전국에서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불교 성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출처:월정사 홈피) 

 

 

 

 

 

 

 

 

 

 

 

 

 지금 남아 있는 당우로는 선원인 청량선원(淸凉禪院), 승당인 소림초당(小林草堂),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영산전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영산전은 상원사에서 제일 오래된 당우이다.

 

 

 

 

 

 

   

 나는 절 마당을 지나시는 이 스님의 발길을 붙든 채 마당 한 켠에 서서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종교와 마음공부에 대한 문답을 했다. 본인을 단지 이 절에서 공부하는 학승이라고만 밝힌 스님은 한 시간 동안 고역의 시간을 당했을 것이다. 되지도 많은 설익은 종교, 역사를 들먹이며 물어 제끼고 이견을 말하며... 그래도 스님은  깊은 공부심으로 못 된 이 중생을 가르치신다. 존함도 여쭈지 못한채 헤어졌다. 다시 한번 꼭 뵙고 싶다.

 

 

 

 

 

 

* 상원사 문수목조동자좌상 (국보 제221호)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보천과 효명의 두 왕자가 창건한 진여원(眞如院)이라는 절에서 시작된 사찰로, 조선 세조가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질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와 같이 상원사는 문수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고개는 약간 숙인 상태이며 신체는 균형이 잡혀 있다.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린 동자머리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볼을 도톰하게 하여 어린아이같은 천진스러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넓은 어깨에는 왼쪽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가로질러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고, 가슴에는 구슬장식이 늘어져 있다. 옷주름은 신체의 윤곽에 따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은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거의 맞닿을 듯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왼쪽 다리를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대좌(臺座)는 마련되지 않았다. 최근에 이 동자상 안에서 발견된 유물에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유래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문화재청 홈피)

 

*상원사 동종 (국보 제36호)

 

 

 <동정각>현판엔 탄허(?) 스님의 현판 글씨인지 들여다 보고 있는데 마침 까마귀 한마리가 울부짖으며 지붕위를 날아 문수전 용마루 귀퉁이에 자리잡고 정적을 깬다.

 

 

 

 

 

 현존(現存)하는 한국종(韓國鍾)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종은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24년(725)에 조성(造成)되어 조선(朝鮮) 예종(睿宗) 원년(元年)(1469)에 상원사(上院寺)에 옮겨진 것으로, 한국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범종(梵鍾)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종뉴(鍾뉴) 아래에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鍾身)이 연결된 형태인데, 이상적인 비례와 안정감 있는 구조, 풍부한 양감(量感)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수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종신에 있는 상대(上帶)·하대(下帶), 네 곳에 있는 유곽(乳廓)의 문양은 모두 당초문(唐草紋)을 바탕으로 2∼4인의 작은 비천상(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圈紋)이 새겨졌고, 종복(鍾腹)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엽(葉)의 단판연화문(單瓣蓮華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흩날리며 공후와 생(笙)을 연주하고 있는데,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理想的) 사실풍(寫實風)의 불교조각(佛敎彫刻) 양식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 상대·하대, 네 곳에 있는 유곽의 구조적인 특징은 한국종의 전형(典型)이 되어, 양식적인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이후의 모든 종에 계승된다. (출처:문화재청 홈피)

 그러나 종을 보호한답시고 동정각은 앞 문은 열려 있는데 세 방향 모두 나무 창 살이 촘촘이 박혀 관람인으로 하여금 답답함을 자아낸다.

종의 사방을 둘러보는데 무척 답답하다.

 

*적멸보궁

 

 

 상원사 본당으로 부터 약 1.5km 거리에 약 30분 가량 소요된다. 우린 상원사 문수전을 옆으로 끼고 발길을 먼저 적멸보궁으로 돌린다. 엊그제 내린 폭우로 보궁가는 길 계곡엔 물줄기 내리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가는 빗줄기를 맞으며 구불구불 보궁 가는 길엔 안개비가 내린다. 보궁은 상원사와 비로봉까지의 딱 중간 지점에 정기가 모아 드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불자들의 신심은 이렇게 멀고 험한 산길도 마다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이 지긋하게 드신 노인 신도 분도 꿋꿋하게 산 길을 잘도 오른다. 마침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수련 온 초등학교 학생들의 모습도 눈에 많이 띈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을 가리킨다.오늘날 한국에서 적멸보궁의 편액을 붙인 전각은 본래 진신사리의 예배 장소로 마련된 절집이었다. 처음에는 사리를 모신 계단을 향해 마당에서 예배하던 것이 편의에 따라 전각을 짓게 되었으며, 그 전각은 법당이 아니라 예배 장소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았다. 다만 진신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예배 행위를 위한 불단을 마련하였다.

 

 한국에서는 신라의 승려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 그것이다.이들 5대 적멸보궁은 불교도들의 순례지이자 기도처로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신봉된다. 필자는 오늘 상원사 적멸보궁을 다시 방문해보니 가는 길에 중대 사자암이라는 비로전을 위시하여 멋진 당우 불사가 이루어져 있었다.다섯 적멸보궁 중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을 빼고 네군데를 방문하였다.가까운 시일안에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도 방문하고 싶다.

 

-적멸보궁 가는 길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