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단상(斷想)

-천년 고도 경주 문화유적 답사 길 (경주남산 고위봉)

천지현황1 2008. 12. 1. 05:43

-천년 고도 경주 문화유적 답사 길 (경주남산 고위봉,495m)

 

* 2008.11.30 / 용장마을(10:52)-고위봉(12:30)-칠불암(13:30)-용장골갈림길(14:40)-용장마을(16:00) 

                                                                                                                                                              (출처:부산일보)

 

  신라시대 천년 고도 경주의 옛 지명은 <서라벌>이다.'태양이 제일 먼저 비춰주는 성스러운 땅'이라는 경주라는 도시는 터키의 이스탄불처럼 곳곳이 노천 박물관이다.그래서 특히 외국 관광객들은 경주나들이에 일주일의 여정을 잡고 돌아볼 정도로 문화유산이 곳곳에 널려 있다.그러나 경주 남산은 보물단지인데도 내국인들은 짧은 경주 여행일정에서는 제외되곤 하기도 한다.그러나 경주 남산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경주역사문화지구)으로 살아있는 불교 노천 박물관이다.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진다.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하루 일정으로는 다 돌아 볼 수 없는 엄청난 볼거리 우리 문화유적이 도처에 널려 있다.남산만 보는데도 족히 3일은 걸린다.10여년 전에 필자는 남산을 돌아보고 콩당콩당 뛰던 가슴을 기억해낸다. 차창가에 스쳐가는 아름다운 우리 산하에 다시 한번 옛 기억을 되살리며 가벼운 흥분에 젖을 즈음 버스는 오늘의 들머리 용장마을에 우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오늘은 '천년 고도 문화유적 답사길'의 일환으로 용장마을을 들머리로 해서 고위봉을 거쳐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과 칠불암의 마애석불을 친견하고 봉화대능선을 거쳐 금오봉을 오른 다음 다시 용장사지에 들러 석불좌상,마애미래좌상,용장사 3층석탑 등 보물과 사적 여러 점을 답사하는 흥분으로 가득하다. 

 

 경주남산은 고위봉(495m)과 금오봉(468m)을 중심으로 동서 너비 4km,남북 길이 8km의 타원형으로 그 면적이 무려 100만평에 이른다.금자라 한마리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47개의 크고 작은 골과 아기공룡 두리능선을 비롯하여 고위능선,봉화대능선 등을 거느리며 작으면서도 큰 산이다.왕릉이 13기나 묻혀있고,산성지 4개소,발굴된 절터가 147개소,불상이 118구,석탑이 96기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경주남산은 보물창고인 셈이다.2005년 통계로 경주 인구는 27만이다.삼국유사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서라벌의 인구는 얼마였을까? 기록엔 17만8936호가 살았다는 기록이다.1호에 5인이 살았다고 가정할 때 90만명이 되니 현재 경주 인구의 세 배인 셈이다.과연 기록이 과장되지나 않았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려 보며 아기공룡 '둘리'능선의 밧줄 여러개와 씨름한다.  

 

같이 동행한 75세의 여성 회원 분이 아기공룡 둘리 능선을 즐기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모습으로 함께 산행 시마다 늘 경외로운 마음이 든다

 

 

 

 

 

 신선암의 마애보살 반가상

      봉화골 정상에서 잠깐 길을 내려 신선암 절벽을 돌면 얕게 감실을 파고 조각된 보살상을 만난다.가늘게 뜬 눈매에는 깊은 사색에 잠긴 듯 아련하고 머리엔 보관이 씌어있다.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전체적으로 느끼는 감은 하늘을 나는 비상하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칠불암의 마애석불  

 

 신선암 깎아 지른 절벽 밑으로 칠불암이 보인다.

가파른 내림길을 한참 내려 칠불암을 친견한다

절벽에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고

네모난 큰 돌 사면에는 각각 면 마다 부처님이 조각되어 있어

일곱 분의 부처님이 오여 있어 칠불암이라 하는 모양이다 

온화하고 자비로운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안하다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쓴 곳, 용장사

 봉화대능선을  탄지 채 한 시간이 못되어 용장마을 팻말을 따라가다 보면 용장사지를 만난다.그곳은 김시습이 젊은 날 7년간 은거하며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썼다는 곳이다. 지금은 절은 사라지고 골짜기 언덕 위에 삼층석탑이 하늘금과 마루금을 이루며 우뚝 서서 경주남산의 정기를 받아 사바세계에 전하는 듯 그렇게 우뚝 서서 손을 반긴다.

 

 용장사는 조선 초기 문인이며 학자였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평가받는 <금오신화>를 쓴 곳으로 알려져있다.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한명회 등을 시켜 김종서 등 충신들을 죽이고 자신은 영의정이 되어 정사를 전횡한다.그리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 청령포로 유배시키고 마침내 자기가 왕위를 찬탈한다. 이때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지칭되는 김시습은 그의 나이 21세때 머리를 깎고 전국 유랑길에 나선다.여기에서 생육신이란 집현전 학사출신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를  주장하다 처형당한 사육신과 대비하여 생긴 용어로 생육신은 벼슬자리를 버리고 절개를 지키며 세상을 숨어 산 사람들을 일컫는다. 김시습은 10년 유랑길에서 발길을 잠시 멈추고 이곳 용장사에서 31세에서 37세까지 7년간 칩거한다.고독한 유랑길을 접고 설잠이라는 법명을 받고 남산 금오산 자락 용장사에서 7년간 칩거했던 매월당 김시습은 그의 파란만장한 59년의 인생길에서 어쩌면 이 남산에서 그의 황금기를 보낸 셈이다.이 때 금오신화를 썼다.

 

  매월당은 강릉 김씨 김일성의 아들로 서울서 태어났으나 13살 어린나이에 어머님의 죽음으로 울진 외할머니의 손에 자랐는데 어머니 삼년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병약한 아버지와 계모를 두고 당시로서는 늦은 20살에 남씨와 결혼했으나 1년이 지나지 못하고 끝났고,유랑길을 돌다 40대 후반에야 얻은 새 아내도 채 1년을 못 채우고 죽었다. 50살이 지나서 양양부사 유자한이 계집종을 보냈으나 흥미 없어하니 보따리를 싸서 가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매월당은 세 여인 모두와는 불행한 인연이었고 지지리도 여자 복이 없었던 셈이다.그 후 59세에 병사할 때 까지 전국을 유랑하며 살다가 간 그를 일러 후세인들은  생육신이라 칭한다.

 

 

 용장사터 삼층석탑

 

 

용장사터 마애여래좌상  

 

 

용장사터 석불좌상 

 석불좌상이 목이 잘려 나간 채 대좌 위에 늘름하게 앉아 있다

결가부좌한 불상은 보존상태가 좋고 편안한 자세이나 목이 없어 보기가 좀 그렇다

상상으로 본 상으로는 온화한 자비가 흐르는 얼굴이련만...

 

 

 

 

  용장골 용장사터를 뒤로 한 채 길을 내리다 설잠교를 만난다.김시습의 법명 '설잠'을 빌어 설잠교라 칭한 것이다.

 

 

 

 설잠교를 지나 계곡 길을 한참 내리다가 용장마을 거의 다 와서 오른 쪽 계곡 길 145m거리에 절골 약사여래좌상 팻말을 만나 다시 산 길을 올라 석불을 만나보니 또 목이 잘려 있다.계곡에 쓸쓸히 앉아 있는 불상을 뒤로 하고 산 길을 내리는 마음이 갑자기 무겁다.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얼마나 자비로운 세상일까?  

 

 

 

  작으면서도 큰 산,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길은 자신에게 많은 화두를 던지고 1차 답사의 길을 마쳤다.해가 긴 여름 날 다시 한번 삼릉길을 들머리로 금오봉-오산골 코스를 잡아 다시 신라 천년 역사 속으로 타임 비행을 해 보리라. (2008.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