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휴가여행에 18개월 된 윤ㅇ이와 함께 했다. 설악산 여행 후 두번째 여행인 셈이다.윤ㅇ이 동생을 임신한 딸 때문에 처음부터 여행 동선을 길게 잡을 수 없어 주로 맛기행 중심으로 계획했다.장마철 비 예보가 있었으나 일정을 강행한다.비는 간헐적으로 가끔 만났으나 폭우는 아니었다.윤슬이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으면 싶다.
【포토기행】
윤ㅇ이는 절집에 왔다고 부처님께 예를 올린다.지난 여행 때 월정사에서도 절을 하더니 잊지 않고 참배한다.
부산에서 온 오빠들과 소통 중,오빠 왈,"부산 놀러 온나"
무량수전 안에서 신도들이 스님의 염불에 맞춰 참배를 올리는 것을 보더니 윤ㅇ이도 문 밖에서 '기도 삼매중' - 약 3분 정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도하고 있으니까 10여분의 관람객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했다.기도가 끝나고 나니 사진작가 한 분이 지켜보다가 신통하다며 카라멜 한통을 건네준다.
"윤슬아,그만하고 가자".무료해진 할머니가 재촉한다.그러나 묵묵 무답이다.
'기도하느라고 수고했지...물 한모금 마시거라이~'
영주 부석사를 둘러보고 마을 동구 밖 정자에서 점심상을 편다
디카만 들어대면 사진모델인양 포즈를 잡는다.
봉화 닭실마을에서 잠깐 휴식한 뒤 만산고택을 찾았다.실제 후손이 거주하며 민박을 치는 곳이기도 하는지 관람 후 두 가족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백암으로 향한다.
백암 한화리조트에 여장을 풀고 윤ㅇ이는 리조트에 남긴 채,아내와 둘이서 백암산 들풀탐방을 나간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후포항으로 갔다.식사 전 윤ㅇ이에게 바다구경을 시킨다.
이튿날 월송정으로
월송정 뒤 바닷가 모래밭에서 두꺼비집 짖기 놀이와 풀밭에서 여치와 친해지기
다시 차를 몰고 북으로 북으로
성류굴 관람차 찾앗으나 줄이 100여m나 이어져 포기하고
다시 남으로 기수를 돌려 백암온천으로
리조트에서 체크아웃 후 안동 하회마을 가던 중 영양산촌생활박물관에 들린다
박물관을 나와 하회마을 가는 길에 23년 가업으로 이어왔다는 안동닭찜 전문점인 <장수삼계탕>에서 안동찜닭으로 점심을 들고,윤슬이는 주인이 특별식으로 만들어 준 국수를 신나게 먹는다.
비포장도로를 3~4km들어가서 '병산서원'을 둘러보고
하회마을에 들렀으나 찜통더위때문에 걷기를 포기하고 입구 정자에서 수박파티를 한 후 상경 / 2박3일이 훌쩍 추억의 시간 속으로 흘러갔다.
【김윤슬 여행 사진첩】
무량수전은. . .
" . . .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 . "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서서><최순우전집>)
▶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되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잛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장단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맞추어야 하므로 품이 훨씬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집들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45호)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 대사가 창건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화엄종 수사찰인 부석사에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전하고 있어 부석사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해 준다.
현존하는 유물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신라시대의 것으로는 절 입구에 세워진 당간지주, 무량수전 동쪽의 석탑을 비롯한 3층석탑 3기, 석등 2기, 그리고 자인당에 봉안된 3구의 석불좌상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로는 무량수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소조아미타여래좌상, 조사당에 그렸던 벽화 6점, 원융국사비, 그리고 화엄경 목판 등을 들수 있다. 조선시대의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현재 괘불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승당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큰 석조와 맷돌이 남아있어 부석사의 사격(寺格)을 전하고 있다. 또한 경내에는 괘불대, 석등의 화사석, 불상광배편, 배례석, 장대석 등 석물의 부재들이 산재해 있다.
원래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우수한 미술품들이 있었겠지만 경내에 현존하는 유물들은 화엄종의 수사찰인 부석사의 지위와 유구한 역사에 비해 그다지 많은 수는 아니다. 더구나 이들 가운데 석불상들과 3층석탑 등은 부석사의 유물이 아니고 다른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주심포계 건물로 손꼽히는 무량수전과 여기에 봉안된 소조 불좌상, 현존 최고의 사찰 벽화인 조사당 벽화, 당간지주와 석등, 고려각판 등의 유물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1916년 무량수전의 해체 수리 때 대들보에서 금동 약사불입상을 비롯한 20여 구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13구의 불상들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조사당 벽화 (국보 제46호) 부석사에 전하는 벽화 6점은 원래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것이다. 일제 시대에 벽체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은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사원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상을 그린 것인데 이 절의 창사주인 의상대사를 기린 조사당에 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를 외호하려는 의도로 제작한 듯하다. 크기 : 205.0 X 75.0 센티미터
▶ 석등 (국보 제17호) 부석사 석등은 無量壽殿 중심 앞 中庭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安養樓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拜禮石이 현존한다. 이들 석등은 배례석이 있는 부석사는 義湘(625~702)이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창건한 이래, 그 제자들에 의해 法燈이 계속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神琳 이후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華嚴宗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곧 이 무렵은 신라 景文王代(861~874)로서, 부석사가 위치한 太白山은 新羅五岳 중 北岳으로 숭앙되며 비중있는 화엄종 본찰의 중심무대가 됨에 따라, 사찰 내에는 석등 이외에 大石檀, 石龍, 長臺石, 石搭 등이 이 무렵이 9세기에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 또 다른 석등 郡材 2기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이고, 다른 하나는 醉玄屢 앞의 옥개석과 간주석 파편 일부를 통해 알수 있다.
▷ 조사내용
석등의 각 부재는 상륜부만이 일부 파손되었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지표면에 하단부가 묻혀 대석의 하단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지대석은 3매의 판석이 조립된 방형의 지대석으로 상면에는 하대하석을 받치기 위해 弧形의 받침대가 2단 각출되었고, 네 귀는 들림현상이 거의 없이 평이하다. 하대석은 방형의 하대하석 위에 하대상석인 팔각 원구형의 연화대석이 얹혀진 구조로 이들은 각각의 別石이다.하대하석 상면에는 角形과 弧形의 2단 받침대가 마련되고 側斜面의 상하에는角帶가 돌출되었다. 각대 내부에는 음각면의 안상이 2조씩 모두 8개가 새겨져 있다.
연화대석은 팔각 중심에 복엽 연판문이 모아지고, 그 끝 꼭지에는 귀꽃을 돌려 장식하였다. 이들 팔엽의 연화판 사이의간엽은 상하가 겹친 重辦이다. 연화대석 상,하면에는 받침대가 있는데, 하면은 1단의 높이 30mm의 각형받침이, 상면에는 4단의 높이 65mm의 받침이 角形과 弧形으로 있다. 내부에는 간주공이 뚫렸다.팔각형의 간주석은 한 변이 145mm로 상하의 두께 차이가 거의 없으며 안허리곡도 없는 편이고, 상하끝은 상,하대석에 꽂을 수 있는 촉이 마련된 구조이다. 상대석 역시 팔각꼭지에 팔엽 단판 연화문 중심이 모아지게 구성되었고 화판 내부는 보상화문이 들어 있다.
하면은 3단의 받침대가 마련된 후 外緣의 연화문과 연결되고 상면은 2단의 받침대가 마련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각형받침이다. 上臺帶는 50mm로 굵기가 두꺼워 화사석과 상대석의 경계가 뚜렷하며 그 상면은 중앙으로 갈수록 귀솟음이 되어있다. 팔면체의 화문석은 내부가 비어있고 사면에 장방형의 창이 뚫렸으며, 나머지 사면 외부에는 보살입상이 浮彫되었다.
火窓높이 410mm, 너비 170mm로 외곽에는 1단의 윤곽대가 마련되고 윤곽대 내부에는 鐵釘孔이 12개씩 돌려있고 이 구멍은 한쪽에만 14개가 있으며 그 배열도 특이해 개폐시설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바닥에는 가로 180mm, 세로 150mm의 등화시설로 보이는 방형의 段이 한 단 파여 있다.
화사벽에 장식된 보살들은 모두 원형의 두 광이 있고 삼면관을 머리에 쓰고 연화대에 서 있는데 목에는 三道가 분명하며 수인은 양 손을 모으거나, 늘어뜨린 천의를 잡기도 하고 연꽃과 보주를 어깨와 가슴에 들고 서 있는데, 자세들이 모두 자연스러우며 신체가 날씬하다. 이 보살들은 상의는 입지 않고 천의만 양 어깨에 늘어뜨린 상태고 하의는 군의를 입고 있다. 옥개석을 삿갓형태를 하고 팔각 옥개면은 仰曲과 안허리가 분명하며 처마선도 경쾌한 곡면을 나타내고 있다. 옥개 상면은 팔엽복 판연화문의 蓮華冠이 덮혀 있고, 그 위로 호형과 각형의 층급 받침대가 2단 마련되었다. 상단 상륜받침대 동서측 중앙에는 엄지손가락 만한 홈이 파여 있기도 하다.
처마 안쪽에는 깊이 28mm, 너비 20mm 切水溝가 돌려지고 중앙에는 옥개받침대가 2단 각출되어 있다. 내부 상면은 상륜부를 낄수 있는 竿孔이 지름 220mm로 뚫려있고 구멍은 처마쪽으로 갈수록 점차 옥개면의 형태로 넓게 벌어져 있다. 상륜부는 원래 보주형의 연봉이 있었는데 현재는 보륜의 중간부까지만 남아 있다. 상륜은 하단부에 촉이 있어 옥개석에 끼워지게 되고 외부에는 호형과 각형의 3단 받침이 있고 보륜 중앙허리에는 4엽의 만개한 연화문이 띠와 함께 돌려져있다. 이외에 석등과 동일한 시기와 양식으로 조성된 배례석이 석등 앞에 자리하고 있다. 석등과의 거리는 800mm이고 안양루와의 거리는 2,250mm 떨어진 상태로, 그 형태는 장방형이며 1,420mm x 850mm x 300mm 크기이다. 배례석 상면 중앙은 子房이 큰 팔엽단판에 간엽이 있는 연화문이 양각으로 시원스레 장식되어 있다.
특히 넓은 자방 외곽에는 원형의 線帶가 돌려 있다. 四面에는 상, 하에 걸쳐 角帶가 한 단씩 각출되어 있고 사이에 안상이 낮으막하게 파여 있는데 앞뒤에는 4개의 안상이, 좌우 측면에는 2개의 안상이 각각 장식되어 있다. 이들 안상 아랫면은 하단부에 마련딘 받침대와 바로 연결되는데 받침대는 3단이 넓게 마련되어 안정감 있다. 이 석등의 가장 큰 특징은 기단부가 방형의 지대석과 하대하석위에 팔각의 복엽 복련대석이 놓여 이루어진 점과 연화대 첨단부에 귀꽃이 장식되어 있는 점, 그리고 화사석 사면에 보살이 장식된 것을 들 수 있다. 즉 종래이 방형의 기단형태에서 팔각형태로 바뀌어 가는 변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기단부 하대석의 연화대 받침대가 원형에서 팔각으로, 그 상면은 간주받침대가 굽형으로 각출된 점 등 양식의 세부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간주석을 받치게 되는 연화대석 상면의 角形과 弧形의 4단의 받침은 형태가 장식적인 층단이 마련되므로, 연화대석 의 높이는 그 폭에 비해 매우 낮게 조성되었다.
상대 앙련이 연판 내에는 花紋이 있고 상대석의 두께도 하대석의 연화대석처럼 얇은 편이며, 이들 상, 하대석의 間葉은 2단의 重瓣 구조를 하고 있다. 화사석의 4개의 화창이 개설된 벽면 四壁에 사천왕상 대신 보살입상이 장식된 것은 매우 특징적이며, 옥개석은 옥개마루 쪽이 갑자기 들려 안허리곡이 심해 날카로운 감도 없지 않다. 이와 같이 연화문의 간엽이 중판인 점, 기단부에 귀꽃과 간주석 받침대의 발생, 그리고 상대 연화문 내의 보상화문이 화사석의 보살상의 장식 등과 같은 세부양식으로 보아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