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단상(斷想)

-발왕산 칼바람 맞고 눈 속에 파묻히다 (평창 발왕산)

천지현황1 2005. 7. 29. 15:52

-발왕산 칼바람 맞고 눈 속에 파묻히던 날 (평창 발왕산)

----------------------------------------------------------------

*2005.02.20 (일) / S안내 산악회를 따라서

*용평스키장 주차장(10:30)-레인보우슬로프-드래곤피크-능선-정상(12:40)-1391봉-1253봉-  곧은골-용산리-주차장(16:00)

--------------------------------------------------------------------------------------

발왕산 정상에서 바라 본 산세

 

 늘은 발왕산의 칼바람을 맞고 눈 속에 파묻히며 자신의 인내를 시험한 날이다. 예정대로라면 이번 주 산행은 지난 주말 충주호의 제비봉에서 바라본 제천의 ‘금수산’이다. 그런데 갑자기 강원도에 많은 눈이 내렸다는 TV 일기 방송이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설산(雪山)으로 유혹을 한다. 산행지를 물색하다가 설원의 정취가 가득한 산, 발왕산으로 정했다. 산악회를 따라 하는 산행은 처음이기도 하다. 3일 전에 예약을 하고부터 이미 나는 발왕의 설산 풍경을 상상으로 즐겨왔다.

 

 이번 겨울엔 강원도, 전라도 심지어 저 남쪽의 한라산까지 지방에 따라 폭설이 많이 내렸다. 그런데도 내가 사는 곳 서울은 왜 그렇게도 눈발만 보이고 마는지 심통이 날 지경이다.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나라는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는 즐거움이 있다. 며칠 전 서울 도심에도 눈이 조금 내렸지만 이내 녹아 버렸다. 그러나 아파트 발코니에서 바라 본 삼각산 봉우리에 그리고 검단산 예봉산 남한산성 산줄기엔 흰 눈으로 덮여 있어 조망이 시원하다. 그래서 일을 대강 마치고 늦은 오후에 가장 가까운 남한산성을 찾아 두 눈(眼과 雪)을 즐겼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심설산행을 하고자 ‘한국의 산하’에서 여행정보를 얻어 평창의 설원으로 향한다.


  평창으로 향하는 차 안은 조용하다.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나온 산객들이 모자라는 잠을 보충하나보다. 강원도 깊숙이 들어오자 멀리 차창에 보이는 높고 낮은 산들이 정겹게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소복으로 갈아입은 산봉우리들이 한결같이 잘 생겼다. 봄, 여름, 가을산도 아름답지만 겨울산의 정취 또한 매혹적이다. 능선과 골짜기들이 적절하게 조화롭게 배치되어 아름다운 겨울 풍경을 연출해낸다.

 

 스는 용평스키장 대형 주차장에 들어서서 산객들을 토해낸다. 산객들의 연령 분포도 다향하다. 30대 초반에서부터 60대 후반까지, 그리고 부부 산님들도 간혹 눈에 띈다. 대형 관광버스 두 대에서 60-70 여 명은 족히 될 듯 하다. 사잇골 등로가 폐쇄된 때문인지 주차장에서 레인보우 슬로프 길을 따라 스키어들과 뒤 섞이며 등산을 시작한다. 매서운 바람이 옷 깃 속을 파고 들기 시작한다. 서울의 기온이 영하 9도라고 하니 이곳은 아마 영하 15도쯤 되는지 거기다가 바람까지 매섭게 불다보니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는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일렬종대로 슬로프 길을 따라 오른다. 처음엔 발목까지 눈이 빠지더니 점점 오를수록 그 깊이가 더 깊어만 간다. 미끄러지기도 하고 푹 깊이 빠진 앞 사람의 발자국을 밟아가며 오르는 길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거기다가 슬로프 5부 길부터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하자 여자 산님들 하나 둘 씩 오르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생긴다. 오르는 길 내내 불어대는 칼바람에 모두들 혀를 내두른다. 소백산 칼바람과 대관령 칼바람이 세다고 하나 이보다는 덜하다고 말하는 어느 산객의 얼굴엔 빨갛게 볼이 얼어 있고 입가엔 하얀 서리가 맺혔다. 아마 내 얼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인내를 시험하며 어느덧 드래곤 피크에 다다른다. 드래곤 피크에서 정상 가는 길엔 주목에 설화가 피어 있긴 하나 쌩쌩 불어대는 칼바람에 설화가 낙화되어 멀리 날아간다. 그래도 정상 가는 안부엔 사람들의 발자국이 나 있어 처음으로 길이 편하다. 아마 어제 토요일이라 선답자가 지나간 길 때문이리라. 슬로프 길을 두시간 넘게 칼바람과 싸우며 드디어 발왕산 정상에 섰다.

 

 왕산(發旺山 1,458m)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과 도암면 그리고 강릉시 왕산면을 경계로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에 딸린 산으로 고루포기산(1,238m), 옥녀봉(1,246m), 두루봉(1,226m)을 품고 우뚝 솟아 있다. 서쪽으로는 박지산(1,391m), 가리왕산(1,561m) 중왕산(1,376m) 백석산(1,364m)등이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천이삼백 미터를 훌쩍 넘는 고산준령들이 즐비하다. 물론 지리산의 장쾌함만 못하지만, 정상에 서면 사방이 올망졸망한  산, 산, 산으로 이어져 발왕산의 장쾌함도 지리산과 견줄만하다. 경사가 완만한 북쪽엔 용평스키장이 자리 잡고 영동고속도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대관령엔 소복하게 쌓인 순백의 설야가 펼쳐진다.

 

 디카가 얼어 사진 찍기도 힘들다. 이내 바데리가 방전된다. 장갑을 벗고 셔터를 누르려는데 손이 곱아 얼어 버린다. 다시 디카는 배낭에 집어 넣고 얼른 장갑을 낀다. 시야에 들어오는 장쾌한 산봉우리들의 모습을 눈으로만 담는다. 사방이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출렁이는 바다의 파도와 같다. 

 앞서가던 산행대장이 발왕재 못 미쳐 되돌아오며 눈이 깊어 더 이상 길을 내기가 힘들어 전진을 못하겠단다. 정상 넘어 발왕재 가는 길은 눈 깊이가 보통 70여 센티미터 정도이고 어느 곳은 1미터는 된다. 70여 명 중에서 중도 포기하거나 정상에서 드래곤 피크로 되돌아간 50여명을 제외하고 20여 명만 남아 곧은골 용산 방향으로 하산한다. 원래 예상코스는 1070봉을 거치고 1166봉을 거쳐 박지산을 근거리에 두고 하산할 예정이었다.

 

 칼바람은 쉬지 않고 불어대고 다리는 눈 속 깊이 무릎 위 까지 빠져들고 몸체가 넘어지기를 여러 번, 가까스로 내리막길을 탄다. 아무 생각도 없다. 오직 푹푹 빠지는 다리를 곧추 세우며 중심잡기에 바쁘다. 용산 방향으로 5부 능선 쯤 내려가는 데 한 무리의 산객들이 길을 내며 올라오고 있다. 얼마나 힘이 드는지 이들도 정상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여러 번 물음을 받는다. 내려가는 길이 더 힘 든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잔뜩 준 탓인지 다리가 뻐근하다. 

 스패츠를 했기 때문에 바지 속으로 눈은 들어오지 않으나 얼굴은 바람에 얼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추워서 중간에 쉴 틈도 없이 오직 전진만 한다. 산 밑 2부 능선 쯤 와서야 바람이 좀 잔다. 무릎 깊이의 눈 속에서 고개를 쳐든 산죽을 발견하고 배낭 속 디카를 꺼내 한 컷 잡아 보지만 손이 금방 곱기는 마찬가지다. 
  산을 내려와 눈과 얼어붙은 빙판길 차도를 한 시간쯤 내려와 주차장에 도착한다. 버스 안에서 몸을 녹이며 캔 막걸리에 소주를 섞어 들이키니 얼었던 얼굴이 녹자마자 다시 벌겋게 달아오른다.  금년 겨울 서울에서 눈 구경 제대로 한번 못 했다고 그렇게도 눈 타령을 했더니 발왕산에 와서 눈 속에 원 없이 파 묻혀 봤다고 생각하니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오늘 발왕산 산행은 점심도 먹지 못한 채 칼바람과 깊은 눈 속에 파묻힌 잊지 못할 산행이 될 것이다. (2005.02.20)


 

▲▼ 달리는 찻창으로 본 대관령 맞은편의 겨울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