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내장산 까치봉 (내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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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2.08 / 세 부부
* 내장사 일주문-까치봉-연지봉-망해봉-불출봉-서래봉-백련암-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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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반야봉 가는 길섶에서 산죽 흐느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세파에 부대끼며
시달린 나그네의 시름을 덜어주는 바람 이는 소리로 기억한다. 오늘 나는 눈 덮인 내장산 까치봉 산길에서 또 산죽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다. 호남의 금강이라던가. 조선 팔경의 하나로 손 꼽는 아름다운 산, 내장산은 하얀 누비이불을 머리에 이고
기암괴석과 말발굽 모양의 능선과 봉우리를 자랑하고 있다. 정읍시 남쪽에 자리잡은 내장산은 순창군과 경계를 짓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새벽길을 달려온 피로가 정읍 최 원장 집에서 마신 백련차 한잔에 녹아 났다. 익산에서 합류하기로 한 양 선생 부부를 기다리니 무쏘를 타고 의기양양하게 나타난다. 청년 같은 아저씨 셋과 중년의 아주머니 셋이 오늘 산행 일행이다. 무쏘를 타고 가는 내장사 길은 눈길 때문인지, 한 명의 정원 오버 때문인지 슬슬 기어간다. 우리는 일주문에서 까치봉, 연지봉, 망해봉, 불출봉, 서래봉 코스로 능선 일주코스를 잡았다. 지난가을에 아내와 단풍 구경하겠다고 새벽길을 달려와 오른 그 서래봉의 기암괴석도 흰눈으로 흠뻑 치장하고 있다.
해마다 호남지방은 눈이 많이 내린다. 그 중에도 정읍, 고창 쪽은 유난히 눈이 많다. 내장산도 눈이 많이 내려 입산통제 방송이 나와서 은근히 걱정했는데 통제가 해제되어 이렇게 산길을 오르니 기분이 상쾌하다. 눈 발자국 오솔길을 따라 일자로 산길을 오른다. 처음엔 사이좋게 웃음꽃이 피는 우스개 소리가 앞사람과 제일 후미에 선 사람까지 들리더니 10여 분이 흐르니 앞 과 뒤 일행 간격이 50 미터, 100 미터 간격으로 점점 벌어진다. 나는 중간에 서서 앞 일행 양 선생 부부와 뒤 일행 최 원장 부부를 조절하느라 신경이 쓰인다. 양 선생 부부는 자주 산행을 한 탓인지 다람쥐처럼 산을 잘 탄다. 반면 최 원장 부부는 산행보다는 댄스 스포츠를 한 5년 열심히 해 그 쪽에 푹 빠져있다. 일년 전 대천 어느 춤 집 무대에서 그들 부부가 추는 춤을 나는 넋 놓고 바라본 적이 있다. 아내는 우리도 같이 댄스 스포츠를 하자고 늘 나를 재촉했으나 나는 끝까지 눈으로만 즐기겠다고 해 아내만 등록해서 열심히 다닌다. 요리하다가도 음악만 나오면 흔들어대는 엉덩이가 제법 리드미컬하다. 아마 학교 다닐 때 무용을 좀 해서 몸이 유연한가보다.
앞 일행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뒤 일행도 눈에 미끄러졌는지 산행을 포기했는지 보이질 않는다. 기다리다가 천천히 까치봉 8부 능선쯤 오르니 양 선생 부부가 기다리며 간식거리를 내 놓는다. 최 원장 베낭을 양 선생이 메고 와서 주인 허락도 없이 꺼내 놓는다. 배, 고구마, 떡과 엿 등 종류도 많고 맛도 좋다. 맛있게 먹는데 잠시 후 최 원장 부부가 숨을 헐떡이며 오른다. 아마 눈 덮인 산을 천천히 감상하며 오르느라고 늦었나보다. 시장기를 좀 면하니 힘이 난다. 까치봉에 오르는 산길에는 굴참나무들이 눈을 머리에 이고 서있다. 기생나무들이 많이 기생해서 잎을 넘실대고 있다. 굴참나무에 기생한 기생 잎이 까치집처럼 보인다. 댓잎소리도 들린다.
까치봉 정상에 오르니 양 선생 부인 정여사가 외간 남자 세 사람과 동그랗게 앉아 컵 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다. 남편 양 선생은 그들 뒤편 저만치 서서 자기 아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다. 뒤따라 올라온 아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어댔다. 나는 넉살좋은 정여사가 부러웠다. 뜨거운 라면 국물을 마셔보라고 국물을 더 얻어 우리한테 건네는 그녀의 모습에 우리는 한 참을 웃어댔다. 그리고 밥 값한다고 산 정상에서 꾀꼬리 목소리로 불러대는 산타루치아 가곡에 사내들은 앙콜을 외치고, 그녀는 ‘목련꽃 피는 그늘아래서~ ~ ~’ 앙콜 곡을 또 한 자루하고, 우리는 그 모습에 또 웃어 재끼고...
까치봉에서 바라보는 내장의 봉우리들은 신선봉, 서래봉 할 것 없이 모두가 장관이다. 멀리 입암산과 백암산이 어깨 동무를 하고 계곡에 보석처럼 박힌 원적암과 백련암이 흰 비단 누비이불을 덮고 빼꼬롬하게 올려다보고 있다. 신선봉(내장산의 주봉, 793 m)을 뒤로하고 서래봉 방향의 능선을 타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은 최 원장 부부가 제비처럼 빠르다. 시야에서 보이질 않는다. 나는 내려가는 길이 괴롭다. 지난 10 월에 다친 왼쪽 무릎 연골 파손으로 아직 완치되지 않았음에도 지난 연말부터 일주일에 두 번쯤 계속 산행을 해왔다. 완치될 때까지 산행을 중단하라는 아내의 만류에도 산이 좋아 나는 산을 찾는다. 이젠 아내도 만류를 포기하고 느린 산행을 나와 함께 즐긴다.
다섯 시간동안 산행을 끝내고, 하산 길에서 컵 라면으로 우선 시장기를 때웠다. 곁들여 마신 정읍 약주는 맛이 일품이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최 원장 왈, “정읍 약주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술이야” 하고 거든다. 술맛이 좋다고 하며 4 홉들이 한 병을 건네주며 서울 가서 맛보란다. 원래 내가 술 욕심이 많다고 아내가 옆에서 핀잔을 주는데도 못 이긴 척 받아 배낭에 넣는다. 서울 가서 술 맛 다시 본다고 생각 하니 흐뭇하고 기분이 좋다. 아내 말대로 내가 술 욕심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정읍으로 나와 우리 일행은 사우나로 몸을 녹이니 피로가 사르르 녹는다. 복분자 술에 피리 매운탕은 나를 또 정읍으로 발길을 자주 하도록 유혹하고, 친구들이 건네는 정이 나를 유인하는구나. 오늘 하루해가 무척 짧았다. 운전대를 아내 손에 맡긴 채 꾸벅 꾸벅 졸다 깨다하며 본 늦은 밤길 서울 가는 도로는 뻥 뚫려 있었다. (200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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