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비가 날면서 살구 향을 맡다 ?
오후 3시 따사한 햇빛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간송 미술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이번 주말 까지 조선후기 화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의 작품전을 연다. 간송 미술관에선 해마다 일년에 두 번, 봄 가을에 2주간씩 정기적으로 미술전시회를 연다. 지난 봄에는 겸재 정선의 그림들을 마음껏 즐겼는데, 이번엔 현재 심사정의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 초충도 등100 여점의 작품들로 전시장이 가득하다.
깊은 산 속 기암괴석 절벽에 늙은 소나무 한그루가 자신의 그림자를 시냇가 흐르는 옥수에서 목욕을 시키고 있다. 숲 속 저 편에는 정자 한 채가 제 모습을 살짝 숨긴 채 적막을 토하고 있다. 정자에서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는 노 선비는 방금 구름타고 하강한 신선인가, 마을 동구 밖으로 술 사러 간 동자를 기다리는 촌로인가.
조선시대 화가 중엔 삼원(三園) 삼재(三齋)로 불리운 화가들이 있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오원 장승업을 일컬어 삼원이라 칭했고,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을 일러 삼재라 일컬었다. 심사정(1707-69)은 조선 문화의 황금기인 진경시대(1695-1800) 중반에 활동하며 조선남종화풍(朝鮮南宗畵風)을 확립한 사대부 화가이다. 현재는 겸재에게서 그림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진경산수화풍을 계승하지 않고 중국의 화보(畵譜)를 철저하게 소화, 조선화 시켰다. 그래서인지 겸재 정선의 작품들과는 그 맛이 달랐다. 전시작품 중 ''촉잔도권(蜀棧圖卷)''은 길이 8m가 넘는 대작이다. 가파른 절벽과 구름에 잠긴 골짜기를 가고 있는 나그네가 그림 곳곳에 등장해 힘겨운 인생역정을 표현한 듯 보였다. 그림마다 구도의 짜임새, 필치의 부드러움, 먹의 번짐의 깊은 맛등 필묵의 세련미가 돋보인다. 그는 조선 최고의 남종문인화가임에 틀림이 없다.
조선회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의 나무 한 그루, 돌 한점, 구름 한 조각까지 모두 여유로움을 선사한다. 여백, 여유가 그리운 현대인에게 조선회화들은 많은 교훈을 암시해준다. 전시장 1,2층을 두 바퀴 돌고나니 전시관 문을 닫을 시간이 된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제비가 날면서 살구 향을 맡다”라는 화제의 그림이 뇌리에 각인된다. "제비가 날면서 살구 향을 맡는다? 거참 기가 막히는 표현 이로고.." 독백하다 간송 선생에게 고마움을 느껴본다. 어둠이 깔리기 바로 전, 길상사로 가는 팻말이 유혹한다. 발걸음을 돌려 길상사 극락전 앞마당에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바라보다 법정 스님을 기억해낸다. 길상사 회주이신 스님이 이 절을 버리고 강원도 산 속 오두막집에 은거하는 뜻을 생각하며 절 오솔길을 산책하다 발길을 집으로 돌렸다. (200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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